맑은 물 2019. 1. 30. 11:45

무한화서

이성복 / 문학과 지성사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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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서花序란 꽃이 줄기에 달리는 방식을 가리켜요. 순우리말로 꽃차례라 하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성장이 제한된 유한화서는 위에서 아래로, 속에서 밖으로 피는 것이고(원심성), 성장에 제한이 없는 무한화서는 밑에서 위로, 밖에서 속으로 피는 것이에요(구심성). 구체에서 추상으로, 비천한 데서 거룩한 데로 나아가는 시는 무한화서가 아닐까 해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다 끝없이 실패하는 형식이니까요. (p. 11)

 

103

사건을 단순하게 가져가세요. 그래야 시가 우러날 틈이 있어요. 시는 사연에 올라타는 것이지, 사연 그 자체가 시는 아니에요. 사연 가지고 시를 만들려 하는 대신, 사연이 삶의 은유가 되도록 하세요. (p. 48)

 

105

상황을 단순하게 제시하고, 상황 자체가 얘기하도록 하세요. 상황이 스스로를 배반하는 지점까지 나아가게 하세요. 내가 그렇게 만들지 말고, 상황에게 그 일을 맡기세요. 상황은 우리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어요. (p. 48)

 

108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말하도록 해야 해요. 이게 안 되면 자기 생각과 감정을 복사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건 꼭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에요. 머릿속에 있는 걸 굳이 밖으로 꺼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p. 49)

 

118

지금 우리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허위의식이에요. 우리가 내버리는 것들 안에 진짜 우리가 들어 있어요. 그 중에는 보기 싫어 버리는 것도 있고,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고 버리는 것도 있어요. 언제나 버림받은 것들을 귀하게 여기세요. 세상에서 버림받은 것들을 구제하는 게 문학이에요. (p. 53)

 

119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이 가장 쓸모 있는 거예요. 이걸 알아차리려면 계속 반복 훈련해야 해요. 축구선수들 연습하는 것 보셨지요. 호루라기 불자마자 바로 돌아서잖아요. (p. 59)

 

121

글을 쓸 때 잡생각을 받아 적어보세요. 일상에서 잡생각은 시에서 진실이고 일상에서 진실은 시에서 잡생각이에요. 우리가 쓸데없다고 버리는 것 안에 우리 자신이 가장 많이 들어 있어요. (p. 54)

 

122

잡생각은 가장 그 사람다운 생각이고, 진짜 인생이에요. 그 안에는 꿈과 사랑, 욕망과 희망이 다 들어 있어요. 잡생각의 채널에 접속하고 나면 나도 없고, 너도 없고, 잡생각이라는 것조차 없어요. (p. 54)

 

125

뭐든지 잘 들여다보세요. 입가에 말라붙은 침 자국, 주방 환풍기에 달라붙은 기름 때, 변기 앞에 떨어진 오줌 방울 …… 세상 모든 의미 없는 것들에게 의미를 되찾아주는 시인은 신이 버려둔 일을 대신 하는 존재예요. (p. 55)

 

126

특이한 것들은 내가 더 보탤 게 없어요. 항상 평범한 것들을 비범한 쪽으로 가져가보세요. 누구나 평범하게 태어나고 평범하게 죽어요. 그것 말고 특이한 게 뭐 있겠어요. (p. 55)

 

136

대상의 모습을 다 그리려 하지 말고, 중요 부분만 포인트로 잡아내세요. 멀리 있는 대상을 줌렌즈로 끌어와 순간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하세요. (p. 59)

 

151

신기한 것들에 한눈팔지 말고, 당연한 것들에 질문을 던지세요. 중요한지 아닌지 생각도 안 해본 것들에 대해 쓰세요. 질문 자체가 답이에요. 어떤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의미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있을 뿐이에요. (p. 64)

 

178

한달음에 쓰세요. 생각이 들어가면 시간과 장소가 흩어지고, 사건의 흐름이 깨져요. 생각은 평소에 하고, 글 쓸 때는 아예 하지 마세요. 하지만 우리는 늘 반대로 하지요. (p. 73)

 

192

글쓰기에서 과정은 결과보다 중요해요. 글이 주는 감동은 전달방식에 있어요. 고통을 끝까지 고통 그대로 두세요. 너무 빨리 결론으로 가면 재미없어요. (p. 77)

 

239

시는 말하는 게 아니라, 말을 숨기는 거예요. 혹은 숨김으로써 말하는 거예요. 슬픔을 감추는 것이 슬픔이에요. 슬픔에게 복수하려면, 슬픔이 왔을 때 태연히 시치미를 떼야 해요. 그것이 시예요. (p. 95)

 

275

다 보고 나서도 한 번 더 봐야 안 보이는 것을 볼 수 있어요. 남의 말 들을 때는 말과 말 사이 침묵도 같이 들어야 해요. 이것이 정말 끝이라고 생각하는 지점에서 한 발 더 나아가야 해요. 빛이 사라져도 사라졌다는 그 느낌은 남아 있잖아요. (p. 107)

 

287

삶을 바꾸는 대신,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려는 게 글쓰기예요.(p. 111)

 

304

글을 쓸 때는 내가 글의 품 안에 들어 있다고 생각하세요. 글은 내가 맺어주지 않아도 스스로 맺어지게 돼 있어요. 글쓰기는 머리가 아니라, 말이 하는 거예요. 써나가다 헛소리가 튀어나올까 봐 겁내지 마세요. 너무 튀면 나중에 잘라주면 되니까요. (p. 119)

 

315

내가 쓴 글은 내 글 이상도 이하도 아닌 정확히 나의 글이다. 왜냐하면 내 글은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쓸 수 없는 것들은 언젠가 다른 글에서 다른 방식으로 씌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써야 할 의무가 있다. 왜냐하면 그때 그곳에 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아무 생각 없이 빨리 써 나가야 한다. 왜냐하면 나의 기억이 함께할 것이기 때문이다. (p. 123)

 

324

글쓰기는 긴가민가할 때 해야지, 다 알고 나면 쓸 게 없어져요. 다 아는데 굳이 뭐 하러 쓰겠어요. 겁먹지 말고 일단 시작해 보세요. 글은 씌어지면서 스스로 정리되고 마무리될 테니까요. 그냥 바람 쐬러 가는 기분으로 가볍게 시작하세요. (p. 127)

 

342

자기 생각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게 중요해요. 자신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는 가봐야 알아요.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데까지 나아가면, 비로소 고요하게 돼요. 그와는 달리, 뭔가 깨달았다는 생각이 들면 자기에게 속는 거예요. (p. 133)

 

352

자기 속에 아픔이 있어야, 리듬도 살고 어조도 살아요. 자기한테 뼈아픈 얘기는 누구한테나 뼈아픈 얘기가 돼요. 그런 시는 오랜 세월이 가도 이끼가 끼지 않아요. (p. 136)

 

359

모과는 계속 닦아줘야 썩지 않는대요. 글쓰기도 매일매일 자기를 닦는 거예요. 나날의 글쓰기는 흐르는 물에 글씨 쓰는 것과 같아요. 기도와 마찬가지로, 글쓰기의 효력은 글쓰는 순간에만 있어요. (p. 138)

 

367

여러분이 우리 아파트 찾아와서, 수위 아저씨한테만 절하고 그냥 가면 안 되지요. 어떤 글이든 인생의 밑바닥에 가닿아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아파트 입구에서 절하고 돌아가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p. 141)

 

368

악한 것보다 피상적인 것이 더 문제예요. 피상적인 말이 떠오를 때는 입술을 꽉 깨무세요. 내가 진실을 배반하면 나도 나를 도울 수 없어요. (p. 141)

 

371

면봉으로 입천장을 문질러 디엔에이를 채취한다 하지요. 어떤 말에도 자신의 온 인생이 들어 있어요. 그러니 머뭇거리지 말고 바로 쓰세요. 무엇 하나 내 얘기 아닌 게 없어요. 글은 인생이 나를 통해 제 얘기를 하는 거예요. (p. 142)

 

373

지금 당장 오 분 만에 글을 써도 오십 년 인생의 역사가 들어 있으니까 안심해도 돼요. 무슨 대단한 얘기를 하려 들지 마세요. 그 대신 자기하고 자꾸 싸우세요. 자기한테는 절대 잘 해주지 마세요. 자신과의 갈등이 클수록 글은 농밀濃密해져요. (p. 143)

 

379

우리가 글을 쓰는 건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야 할지 알기 위해서예요. 글을 쓰면 반드시 자득自得하는 부분, 스스로 터득하는 부분이 있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뭐 하러 애꿎은 몸과 마음을 쥐어짜겠어요. (p. 145)

 

392

진리는 풀잎 같은 칼이에요. 말도 그래요. 어떤 말이 자기 대신 남을 베기 시작하면 안 좋은 말이에요. 하지 마세요. (p. 151)

 

435

글도 마음도 자주 살피지 않으면 나와 다른 사람을 해치게 돼요. 다른 사람 눈치를 보는 도덕과 달리, 윤리는 스스로 책임을 지는 거예요. 자신에 대한 무한 책임! 자기가 얼마나 피상적인지 아는 것이 윤리의 시작이에요. 피상적인 사람은 아무 것도 안 하는 사람보다 더 악질이에요. (p. 167)

 

436

삶과 글은 일치해요. 바르게 써야 바르게 살 수 있어요. 평생 할 일은 이 공부밖에 없어요. 공부할수록 괴로움은 커지지만, 공부 안 하면 내 다리인지 남의 다리인지 구분할 수 없어요. 젠 체 안 하고 남 무시 안 하려면 계속 공부해야 해요. 늘 문제되는 것은 재주와 능력이 아니라, 태도와 방향이에요. (p. 167)

 

440

앎이란 모르는 상태를 견딜 수 있는 능력이에요. 모르는 걸 피하려 하지 마세요.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게 더 나쁜 거예요. 모르면 알 때까지 기다릴 수 있잖아요. 기다림은 힘들어도 좋은 거예요. (p. 169)

 

454

보는 건 왜곡이 심하고 주관적이에요. 구두를 하나 사야겠다고 생각하면 구두밖에 안 보여요. ? 보는 건 마음속에 있는 걸 보기 때문이에요. 자기 내면의 이야기를 보는 거지요. 하지만 듣는 건 달라요. 들을 때는 내 할 일이 별로 없어요. 보는 건 눈동자를 굴려야 하지만, 들을 때 달팽이관을 굴리지는 않잖아요. 듣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에요. (...) 자기 안에 아무 것도 없어야 들을 수 있어요.(...) 작가를 말하는 사람이라 생각하면 착각이에요. 작가는 듣는 사람이에요. (...) 안 들으면 안 보여요. 소통이란 내 말을 들려주는 게 아니라 남의 말 듣는 거예요. 가장 이야기 잘하는 사람은 남 얘기 잘 듣는 사람이에요. (...) 듣는 건 침묵하는 거예요. 입 다물고 있어도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지나가면 침묵이 아니에요. 보이지 않는 수다일 뿐이지요. ‘침묵 silent’이라는 말 안에 듣는다 listen’는 말이 들어 있어요. 무조건 들어야 해요. 그러면 말을 안 줄여도 자연히 침묵하게 돼요. (...) 듣는 건 존중하는 거예요. 말하는 데는 경쟁이 있어도, 들으면 양보하게 돼요. 말하는 데는 시기 질투가 남지만, 듣는 데는 많이 못 들었다는 아쉬움만 남아요. (...) 들으려면 반드시 구멍이 있어야 해요. (...) 구멍은 오직 구멍으로 열려 있을 뿐, 판단하거나 거부하지 않아요. 그래서 임신과 수태가 가능해요. 듣는 건 공부의 시작이에요. (...) 글쓰기는 기도와 마찬가지로 듣기 모드로 들어가는 거예요. 대상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보이지 않는 급소를 찾아내는 거지요. (p. 175)

 

(2016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