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의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
『긍정의 배신-긍정적 사고는 어떻게 우리의 발등을 찍는가』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전미영 옮김 / 부키 / 2011
“모든 불평가들에게 : 목소리를 높이자!”
미국인들이 세계에서 가장 행복하지도 않고 가장 부유한 것도 아니라면 어째서 그토록 긍정적인 자아상과 고정관념을 갖고 있는 것일까? 실은 긍정성이 실제 상태나 기분이 아니라, 세상을 설명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결정하는 이데올로기의 일부라는 것이 이 물음의 답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이데올로기란 ‘긍정적 사고(positive thinking)“이며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하나는 지금 이대로 아주 좋다는, 긍정적인 생각 그 자체를 뜻한다. (...) 긍정적 사고에 담긴 두 번째 의미는 연습과 훈련을 통해 긍정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기 우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p. 23~24)
그런데 이 긍정적 사고의 핵심에는 불안이 놓여있다. (...) 저절로 모든 것이 나아질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훈련이 필요해진다. (...) 긍정적 사고 훈련의 교사를 자처하는 이들은 이런 훈련에 ‘자기 최면’ ‘마인드 컨트롤’ ‘생각 조절’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이는 불쾌한 가능성과 부정적인 생각을 억누르고 차단하려는 쉼없는 노력, 곧 고의적인 자기기만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 긍정적인 사고와 실체적 용기 사이에는 아주 넓은 간격이 존재한다. (p. 25~26)
초기 자본주의가 긍정적 사고에 우호적이지 않았던 반면에 후기 자본주의, 곧 소비자 자본주의는 긍정적 사고와 훨씬 죽이 잘 맞았다. 소비자 자본주의는 ‘더 많은 것’을 원하는 개인의 욕구와 ‘성장’이라는 기업의 지상 과제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 한 기업이든 경제 전체든 영원한 성장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긍정적 사고는 영원한 성장이 숙명인 것처럼 꾸미거나 그것이 실제로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p. 27~28)
여기에 더해 긍정적 사고는 시장경제의 잔인함을 변호한다. 낙천성이 물질적 성공의 열쇠이고 긍정적 사고 훈련을 통해 누구나 갖출 수 있는 덕목이라면, 실패한 사람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개인의 책임을 가혹하게 강요하는 것이 긍정의 이면이다. (p. 28)
21세기로 접어들면서 미국의 낙관주의는 절정에 달한 것으로 보인다. (...) 그러다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그 자체는 이례적인 것이 아니었으나, 모든 일이 괜찮으며 앞으로 더 좋아질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관료들이 침체 가능성 자체를 배제한 것이 무제였다. 빌 클린턴이 마지막 국정연설에서 유례없는 번영을 자축한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닷컴 붕괴가 일어났으며, 2001년 9월 11일엔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이 있었다. 이후 진행된 일련의 사태는 긍정적 사고가 성공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과 진정한 위협에 대처할 능력을 흐린다는 점을 시사한다. (...) 어느 누구도 그런 불편한 단서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탓에 이른바 ‘상상력의 실패’로 귀결되었다. 하지만 다른 뜻에서는 넘치는 상상력이 가동되고 있었다. (...) 다만 최악의 경우를 상상할 능력이나 성향이 부족했던 것뿐이다. (p. 29~31)
나는 개인적인 실망이나 신랄한 기분 탓에 이 채을 쓴 것이 아니다. 고통이 통찰력이나 미덕의 근원이 된다는 낭만적인 생각을 품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나는 미소와 웃음, 포옹, 행복 그리고 즐거움을 더 많이 보고 싶다. (...) 우리는 스스로 초래했거나 자연 세계에 놓여 있는 무시무시한 장애물과 싸우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긍정적 사고라는 대중적 환상에서 깨어나는 것이 그 첫걸음이 될 것이다. (p.33)
1. 암의 왕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긍정적 태도와 면역 체계」
나는 웃음 띤 얼굴로 암을 수용해야만 하는 절박한 사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긍정적인 태도가 회복의 필수요소이기 때문이다. (p. 59)
하지만 면역 체계의 역할은 미생물과 같은 외부 침입자로부터 몸을 방어하는 것이다. 면역 세포들이 맹공을 퍼붓는 과정에는 각기 다른 분자 무기가 총동원된다. 그 과정의 복잡성과 다양성, 동원력은 가히 압도적이다. (...) 이런 과정은 어지러울 정도로 복잡하기 때문에 (그래서 많은 대학원생이 학위를 받지 못하고 수십 년씩 악전고투를 벌인다) 면역 체계는 완벽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결핵균처럼 한 수 엎선 침입자들은 인체 조직 세포를 뚫고 들어와 그 속에 진을 쳐 면역 세포들을 따돌린다. 사악한 HIV(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는 특정 면역 세포를 선택적으로 공격해 인체를 무방비 상태로 몰고 간다. 게다가 면역 세포가 적으로 돌변해 인체 조직을 공격해 루푸스(낭창), 류마티스 관절염과 같은 자가면역질환이 발생하기도 한다. (p. 60~61)
면역 체계와 암, 그리고 감정 상태의 관계는 1970년대에 일종의 상상력을 토대로 꿰맞춰진 것이다. 극도의 스트레스가 면역 체계의 어떤 측면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것은 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 그런데 이를 토대로 많은 사람이 긍정적인 감정은 스트레스의 반대 작용을 할 것이라는 성급한 결론으로 도약해 버렸다. (p. 61)
미생물과 달리 암세포는 외부 침입자가 아니다. 암세포는 일반적인 조직 세포가 변형된 것이므로 반드시 적으로 인식되는 것은 아니다. (...)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면역 체계가 우리 몸의 세포는 피하고 외부 침입자들을 탐지하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면역 체계는 인체에 있는 암을 외부 침입자로 인식하지 않는 듯하다. 왜냐하면 암은 실제로 인체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p. 65~66)
“면역 체계는 양날의 칼처럼 기능한다. … 면역 체계가 암을 촉진시키는 경우도 있고 질병 발생을 막는 경우도 있다.” (...) 2년 뒤 발표된 또 다른 면역 세포인 림프구 역시 유방암의 확산을 촉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 실제로 우리 몸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건 유혹과 비미스러운 거래, 그리고 배신의 드라마다. (p. 66~67)
암세포는 인체의 명령을 깡그리 무시하고 독립적인 기관처럼 재생산을 시작하며, 인체의 용병으로 비유할 수 있는 대식세포는 천성적으로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이 두 종류의 세포는 인체가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잘 통솔되고 통합된 단위가 아니라 세포들 간의 느슨하고 불안정하 연합체에 가깝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p. 67)
굳이 유방암을 ‘선물’이라 불러야 한다면 내가 받은 선물은 이 개인적 경험을 통해 전에는 알지 못했던, 우리 문화에 내재된 이데올로기의 힘에 고통스럽게 부딪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데올로기는 현실을 부정하고, 불행에 즐겁게 굴복하고, 닥친 운명에 대해 오직 자기 자신을 비난하라고 말한다. (p. 72)
2. 주술적 사고의 시대 : 끌어당김의 법칙
「불평 금지」
한 사람의 인생에서 부정적인 사람을 모두 제거한다는 것이 실제로는 무엇을 의미할까? (...) ‘당신을 끌어낼는 사람’을 모두 깨끗이 쓸어버린다면 아주 외로운 처지에 놓일 위험이 높으며, 더 심각한 것은 현실에서 분리되어 버린다는 사실이다. 가족생활을 비롯한 모든 사회생활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살피고 통찰력을 얻는 한편 필요할 때면 상대에게 위안을 제공해야 한다.
하지만 긍정적 사고의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다. 다른 사람은 당신의 보살핌을 받거나 당신에게 달갑잖은 현실을 직시하도록 하기 위해 거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당신을 보살펴 주고, 칭찬하고, 긍정해 주기 위한 존재다. (...) 사람들은 자기감정을 차단하고, 그 결과 심각한 감정 결핍 상태에 이르게 된다. 누구에게도 남들의 문제를 생각할 시간과 인내심이 없다. (p. 88~89)
긍정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이제는 성공을 이끄는 자기실현적인 예언이 되었다. (...) 항상 미소를 띠고, 쾌활하게 행동하고, 흐름을 따라라. 그렇지 않으면 배척될 각오를 하라. (p. 90)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비극과 진정한 드라마로부터 물러선다는 것은 긍정적 사고의 핵심에 깊은 무력감이 높여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p. 92)
3. 낙관주의의 어두운 뿌리
백인 이주자들이 뉴잉글랜드로 들여 온 칼뱅주의는 사회적으로 강요된 우울증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육체적 혹은 정신적 형태의 노동이 아닌 모든 것은, 그러니까 게으름을 피운다든지 쾌락을 찾는 것은 비열한 죄악이었다. (...) 정신적인 문제의 유일한 해독제는 노동이었다. (...) “무릎을 꿇을 일이 있으면 그 참에 바닥을 닦아라.” (p. 113~114)
신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이 요구되었기에 그런 이데올로기가 생존에 도움이 된 것은 분명하지만, 한편으로 그들은 칼뱅주의 그 자체를 견뎌 내기 위해서도 분투해야 했다. 자기혐오에 이를 정도의 자기반성과 끝없는 노력을 요구하는 칼뱅주의의 무게는 신도 개개인이 감당하기엔 벅찬 것이었다. (...) 19세기 초반이 되자 칼뱅주의의 어두운 구름이 걷히기 시작했다. (...) 종교역사가인 로버트 오시는 19세기 미국의 종교 문화가 “(신의 본질, 예수의 의미, 구원, 대속 등) 가장 근본적인 문제들에 복합적인 가능성과 모순, 긴장이 제기되면서 창조적으로 살아 움직였다.”면서 종교 문화의 동요 현상이 극심했다고 강조했다. 9p. 116~118)
긍정적 사고의 가장 좋은 점이라면 칼뱅주의에 분명한 대안을 제시했다는 것일 텐데, 한편으로는 칼뱅주의의 유독한 요소를 보존하고 말았다는 최악의 일면이 함께 존재한다. 가혹한 판단, 죄악에 대한 칼뱅주의식 비난, 자기반성이라는 끊임없는 내면 과제를 강조하는 것이 그런 요소다. (...) 칼뱅주의자들은 느슨함, 죄악, 방종함의 징후를 찾기 위해 스스로 감정을 감시했다. 한편 긍정적 사고에서는 분노나 의심과 관련된 부정적인 생각을 끊임없이 경계한다. (...) 그러려면 기묘한 자기소외가 요구된다. 과제의 대상인 자아가 있고, 그 과제를 수행해야 하는 또 다른 자아가 있다. (p. 131~133)
문제는 왜 그렇게 내적인 부분에만 오로지 몰입하는가 하는 점이다. 왜 사랑과 연대감을 품고 다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지 않는가? (p. 139)
4. 기업에 파고든 동기 유발 산업
동기 유발 산업은 더 넓고 지출 규모가 큰 시장, 미국의 거대 기업들을 포함한 산업계 전반으로 파고들었다. (...) 직장에서의 통제를 위한 수단, 더 높은 실적을 내라고 들들 볶는 자극제가 되었다. (p. 145~146)
긍정적 사고로 가장 눈에 띄게 개종한 부류는 역시 의사결정권자들, 곧 임원과 관리자들이다. (p. 153)
20세기 초반, 의학 및 공학 전공자들이 전문가 집단의 권위를 주장한 것과 같은 시기에 전문가로 부상한 기업 관리자들은 (긍정적 사고와는 정확히 반대로) 모든 문제는 합리적, 과학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중산층의 광범위한 신념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 (...) 대학 교육을 받은 당시의 미국 중산층에게는 한 가지 핵심적인 신념이 있었다. 우리의 목표는 개인의 성공이 아니라 만인의 진보이며, 고도의 수련을 받은 합리적이고 냉철한 전문가에 의해 성취된다는 것이었다. (p. 154~155)
그러다 1980년대에 다운사이징 바람이 휘몰아치면서 기업의 본질 그 자체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p. 155)
기업은 본래 특정 과제를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다. 19세기에 운하나 철로 건설을 위해 면허장을 발부받아 특정한 사업을 수행했던 것이 기업의 유래다. ‘기업’이란 단어는 지금도 단순히 주주를 위해 돈을 번다는 것을 넘어 집단 과제와 관련된 조직이라는 뜻을 담고 있으며, 전후 시기의 기업들은 생산하는 제폼 및 전반적인 사회 기여라는 관점에서 정체성을 규정했다. 하지만 1980년대 금융 자본주의가 도래하면서 주주의 이익이 모든 것을, 심지어 상품에 대한 자부심마저 제치고 가장 중요한 가치로 떠올랐다.(...) 미국의 관리자들은 전문 경영이라는 낡고 느리고 신중한 방법을 내던지고 직관과 즉각적 판단, 육감으로 무장하게 되었다. (p. 156~157)
경영 과학에서 등을 돌린 기업 경영자들은 불확실성이 심화되는 세계를 설명하기 위한 새로운 방식을 필사적으로 찾아내려 했고, 카오스 이론에서부터 아메리카 원주민의 지혜, 탁월성에서부터 동양 종교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대상이 되었다. 기존의 접근법을 거부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일종의 반(反) 합리성이 유행처럼 번졌다. (p. 159)
「구조 조정의 상처 가리기」
기업 구조 조정은 환영해야 할 즐겁고 진보적인 변화이고, 실업은 스스로 탈바꿈할 수 있는 기회이며, 새로운 ‘승리자’ 집단은 격동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기업들이 동기 유발 업체에 높은 비용을 치르며 해 주길 바라는 일도 바로 그것이다. (p. 164)
5. 하느님은 당신이 부자가 되길 원하신다
주류 교회의 신도 감소는 자칭 ‘교회 경영자’라는 새로운 세대가 나타나 ‘전략적 사고’와 ‘공격적인 사업 목표’를 내세우고 새로운 접근법을 시도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p. 194)
기업식 접근법에서는 교회를 열면 신문의 예배 광고를 보고 사람들이 올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우선 해야 할 일은 사람들이 교회에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것이다. (...) 조사 결과 그들이 바리견한 것은 사람들이 ‘교회’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 적어도 어린 시절 경험한 것과 같은 그런 교회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오락(예컨대 록 음악이나 그와 비슷한 음악)임을 알게 되었다. (...) 일반적으로 선교사들이 생활양식의 변화를 감수하고 사회복지 서비스를 수행하면서 지역민 속에 자리를 잡으려는 목적은 단 한 가지, 죄와 구원에 관한 기독교 신앙의 핵심, 곧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다. (...) 그러나 기업가형 목사들은 다르다. 이들은 전통적 교의가 과도하게 도발적이거나 방해가 된다고 판단되면 서슴없이 내던진다. (...) 초대형 교회와 그런 위치를 꿈꾸는 교회들에게는 요구가 많은 기독교의 핵심 교의를 대체할 무언가가 필요했고, 그것이 바로 긍정적 사고였다. 긍정적 사고가 성서에 근거한 진실이거나 성서에 의해 지지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고객’을 (일부 초대형 교회 목사들은 신도를 ‘고객’이라고 부른다) 만족시키기 때문이다. (...) 대다수 긍정신학 설교자들은 자신의 메시지와 기독교 전통 교의 사이에서 아무런 긴장도 느끼지 않는다. 하느님은 선한 분이시니 우리가 최선의 것을 누리길 원하시는 게 당연하다는 것이다. (p. 195~198)
기업과 교회, 특히 기업과 초대형 교회 사이에는 피상적으로 닮은 것을 넘어 특별한 유사성이 있다. 최근 수십 년 동안 교회가 기업과 닮아 가는 가운데 기업은 오히려 교회와 유사해졌다. 기업을 이끄는 카리스마적 인물은 리더십 문제에서 신비에 가까운 힘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거나 그렇게 되기를 열망한다. (...) 어느 경영학 책에서는 카리스마적(저자가 표현한 바로는 ‘변형적’) 리더십을 향한 추세에 관해 “경영 관행의 많은 부분이 순수하게 비유적인 유사성을 넘어서 종교적 헌신의 의례 및 심적 상태와 가까워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p. 203)
하지만 초대형 교회와 기업 사이에는 한 가지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교회는 다정하다. (...) 바로 이 부분이 초대형 교회의 매력 포인트다. (...) 따라서 긍정신학을 받아들인 ‘구하는 자들’의 세상은 직장에서 쇼핑몰로, 쇼핑몰에서 다시 기업형 교회로 아무런 이질감 없이 연결된다. 어디를 가득 들리는 메시지는 똑같다. 당신은 멋진 집과 자동차는 물론 쇼핑몰에 있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 당신에게 그런 힘이 있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그 이면에는 숨죽인 목소리로 경고하는 어두운 메시지가 놓여 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한다면,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용기를 잃거나 패배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당신 책임이다. 긍정신학은 아름다움과 초월, 자비가 없는 세계를 완성하고 승인했다. (p. 205)
6. 긍정 심리학 : 행복의 과학
긍정심리학 및 긍정적 사고 전반의 핵심 주장은 행복이 (낙천성, 긍정적 감정, 긍정적 효과, 아니면 긍정적인 그 무엇이라고 바꿔도 괜찮다) 그 자체로 바람직할 뿐 아니라 건강과 더 큰 성공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실제로도 유용하다는 것이다. (p. 223)
결국에 행복이란 것은 자신의 삶에서 느끼는 만족감으로 측정되는 만큼 아무래도 유복한 사람들, 사회 규범에 순응하는 사람들, 신앙을 위해 판단을 삼간 사람들, 사회의 불의에 크게 개의치 않는 사람들이 그런 심리상태에 근접하기 더 쉽다. (...) 긍정심리학의 진정한 보수성은 현실이 불평등과 권력 남용에도 불구하고 현상 유지에 애착을 갖는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p. 236~237)
긍정적 사고와 부정적 사고 모두 감정과 지각을 구분하지 못하고 현실 대신 환상을 받아들인다. 그러면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거나, 침체로 빠져드는 익숙한 신경 경로가 강화되기 때문이다. 이런 두 가지 경향에 대한 대안은 우리 자신에게서 벗어나 자기감정과 환상으로 채색하지 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 이것이 과학의 방식이다. 많은 사람들이 면밀히 관찰한 결과를 수집해 이 세계에 대한 잠정적인 설명을 만들어 내고, 새로운 관찰 결과가 제시되면 설명의 내용이 바뀌어야 한다. (p. 270)
우리가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 우리가 필사적으로 매달려 있는 그것은 이 세계가 인간의 감정과는 무관하게 인과관계, 개연성, 우연이라는 자체의 알고리즘에 의해 전개된다는 사실을 천천히 깨닫는 과정이었다. (p. 272)
하루하루 살아나가는 데는 심리학자 줄리 노럼이 말한 ‘방어적 비관주의’가 필요하다. (p. 273)
대학에서 배워야 하는 것은 긍정적 사고가 아니라 ‘비판적 사고’이다. 비판적 사고란 본질적으로 회의를 품는 것이다. (p. 274)
아툴 가완디는 이렇게 썼다. “암과 싸우는 사람에게도, 내란에도, 아니면 그저 직장 내의 문제에도 요즘에는 긍정적 사고를 성공의 열쇠로, 심지어는 비밀로 제시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진짜 열쇠는 부정적 사고다. 실패를 의식하고 때로는 예상하기까지 하는 부정적 사고 말이다.” (p. 274)
행복한 환경이 필연적으로 행복이라는 결과를 낳지 않는다고 해서 생각과 감정을 교정하는 내면으로의 여정을 통해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직면한 위협은 현실적이며, 자기몰입에서 벗어나 세상 속에서 행동을 취해야만 없앨 수 있다. (p. 282)
(2016년 10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