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발견-나의 특별한 가족, 교육, 그리고 자유의 이야기 (타라 웨스트오버 지음, 김희정 옮김 / 열린책들/ 2020)
●아버지에 대한 서술
산에서 살면 뭔가 주체적인 인상을 풍기게 된다. 프라이버시와 고립감, 심지어 지배에 대한 감각이 몸에 배어서일 것이다. 산이라는 광대한 공간에서는 아무도 없이 혼자서 소나무와 덤불과 바위들 사이를 몇 시간이고 누빌 수 있다. 그곳에는 광대무변한 공간감에서 나오는 고요함이 있다. 그 엄청난 규모 앞에서는 차분해지고, 인간과 같은 하찮은 존재는 전혀 중요치 않아 보인다. 진은 그렇게 산이 거는 최면, 인간 세상의 드라마를 뛰어넘는 깨달음으로 만들어진 사람이었다. (55)
아버지는 시간에 쫓기며 살았다. 마치 시간이 아버지를 스토킹하는 것처럼 느끼는 듯했다. 하늘을 가로지르는 해를 흘낏흘낏 보는 아버지의 눈초리에서, 파이프나 강철 조각을 살피는 얼굴에서 끊임없이 시간 걱정을 하는 것이 보였다. 아버지는 모든 폐철 조각을 그것을 팔 수 있는 가격에서 그것을 분류하고 자르고 배달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빼고 계산하는 눈으로 바라봤다. (...) 아버지는 이 보잘것없는 이윤과 일분일초 가족을 부양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끊임없이 저울질했다. 불을 켜고, 난방을 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속도로 일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한 번도 아버지가 분류함까지 물건을 들고 걸어가서 넣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냥 선 자리에서 있는 힘을 다해 분류함 쪽으로 던지곤 했다. (98)
"어떻게 풀었는지는 몰라." 종이를 건네면서 아버지가 말했다. "내가 아는 건 바로 그게 답이라는 것뿐이야."
나는 다시 부엌으로 걸어가면서, 깔끔하고 균형 잡힌 등식으로 된 질문과 다 끝내지도 않은 계산들과 어지러운 스케치가 섞인 혼란스러운 풀이를 번갈아봤다. 그 종이의 낯설음은 가히 인상적이었다. 아버지는 이 과학을 자기 손바닥 안에서 자유자재로 부리고, 그 언어를 해석하고, 논리를 해독할 줄 알았다. 그 과학을 구부리고 꼬아서 진실을 쥐어짜 낼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과학은 아버지를 통과하면서 혼돈으로 변하고 말았다. (204)
●배움의 열정을 묘사한 부분 - 타일러, 타라, 리처드
호기심의 씨는 이미 뿌려졌다. 그 씨앗을 기르는 데는 시간과 지루함 말고는 다른 것이 필요 없었다. 라디에이터에서 구리를 빼내거나, 쇠뭉치를 한500번째쯤 통에 던져 넣다가도 문득 타일러 오빠가 공부하고 있을 교실을 상상하곤 했다. 폐철 처리장에서 보내는 죽을 듯이 지루한 시간이 쌓일수록 내 관심은 점점 더 커졌고, 결국 어느 날 정말 괴상한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학교에 다녀야겠다는 기상천외한 생각말이다. (106)
오빠는 오후가 되면 항상 어두운 지하실로 내려가 소파와 벽 사이의 작은 공간에 끼어 앉아 백과사전을 보곤 했다. (...) 내가 다시 지하실에 가서 불을 켜주지 않으면 오빠는 책을 코앞에 대고 어둠 속에서 읽곤 했다. 오빠는 그토록 절실하게 책을 읽고 싶었던 것이다. (107~108)
나는 모르몬 경전을 두 번 읽었다. 신약도 읽었다. 한 번은 빨리 읽고, 두번째는 더 천천히 읽으면서 가끔씩 메모도 하고, 전후를 비교해서 찾아보기도 하고, 심지어 믿음, 희생과 같은 독트린에 대한 짧은 에세이도 썼다. 아무도 그 에세이를 읽지 않았다. 그냥 나 자신을 위해 쓴 것이었다. 타일러 오빠가 자신을 위해, 오직 자신만을 위해 공부했던 것을 상상하면서 말이다. (...) 딱딱한 만연체이지만 의미는 정확한 19세기 어투의 그 책들을 나는 처음에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내 눈과 귀가 적응했고, 우리 모르몬교도의 역사의 편린들로부터 편안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 이야기들은 생생했지만 강연들은 추상적이었고, 모호한 철학적 주제에 관한 글들이었다. 나는 공부하던 대부분의 시간을 이 추상적인 개념에 바쳤다.
돌이켜보면, 바로 그것이 내 배움이요 교육이었다. 빌려 쓰는 책상에 앉아 나를 버리고 떠난 오빠를 흉내 내면서 모르몬 사상의 한 분파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보낸 그 긴긴 시간들 말이다. 아직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참고 읽어 내는 그 끈기야말로 내가 익힌 기술의 핵심이었다. (108~109)
●타라의 배움을 북돋아준 사람들의 말에 대해서
타일러 오빠는 모르몬 경전에서 <진지하고 관찰력이 뛰어난 아이>에 관한 부분을 내게 읽어 주면서 <이 부분을 읽으면 네가 떠올라> 하고 말했었다. (...) 나는 아직도 오빠가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때 내가 이해한 한 가지는 내가 나 자신을 믿어도 된다는 것, 내 안에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193)
"집 바깥의 세상은 넓어, 타라. 아버지가 자기 눈으로 보는 세상을 네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을 더 이상 듣지 않기 시작하면 세상이 완전히 달라 보일 거야." (196)
"엄마가 낳은 모든 자식 중에서," 엄마가 말했다. "제일 먼배움을 저 집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떠날 아이는 너라고 생각했었다. 타일러가 그럴 줄은 예상하지 못해서 깜짝 놀랐었지. 하지만 너는 아니야. 여기 있지 마. 가거라. 아무것도 네가 떠나는 것을 방해하도록 두지 마라." (215)
"계속 도전을 해보세요. 그렇게 하면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는 거예요." (케리 박사가 케임브리지 교환 학생 프로그램 참가를 제안하며) (360)
●타라가 자신의 사고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장면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종의 변화가 있었다. 내가 자각의 길에 들어섰고, 오빠, 아버지, 나 자신에 관해 아주 기초적인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건넨 전통에 의해 만들어져 왔지만, 고의적으로 혹은 실수로 그것이 어떤 전통인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우리가 오직 다른 사람들의 인간성을 빼앗고, 그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담론에 목소리를 보태 왔다는 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 담론을 확대하고 그편에 서는 것이 더 쉬웠기 때문이다. 힘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앞으로 전진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287)
지금 내가 가진 언어를 그때는 가지고 있지 않았었다. 그러나 나는 한 가지 사실은 이해하고 있었다. 과거에는 깜둥이라고 수없이 불리고, 수없이 웃어넘길 수 있었지만 이제는 웃을 수 없게 됐다는 것. (...) 달라진 것은 오직 그 단어를 듣는 내 귀뿐이었다. 내 귀는 그 안에 담긴 농담을 더이상 들을 수가 없었다. 내 귀에 들린 것은 시간을 관통해서 울리는 신호음이자 호소였고, 나는 거기에 점점 더 강해지는 확신으로 응답했다. 이제 다시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갈등에 내가 꼭두각시로 이용되도록 두고 보지 않을 것이다. (287~288)
이제 그 때를 돌이켜 보면서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때문이 아니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내가 기록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 약해 빠진 껍질 속 어디엔가, 천하무적이라는 허구로 속을 모두 비워내 버린 그 소녀 안 어디엔가 아직 불꽃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 그날 밤 내가 쓴 단어들 중 가장 강한 단어는 분노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의혹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라고 쓴 부분 말이다.
확실히 알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확실히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에 휩쓸리길 거부한 것은 내가 그때까지 한 번도 나 자신에게 허락하지 않은 특권이었다. 그때까지의 내 삶은 늘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서술되어져 왔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강하고, 단호하고, 절대적이었다. 내 목소리가 그들의 목소리만큼 강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311~312)
이제 역사를 이해하는 길로 통하는 문을 지키는 위대한 문지기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무지와 편견을 해결했는지를 알아야만 했다. 나는 그들의 저술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각자의 주관적 편견이 가미된 주장들을 서로 교환하고 개선해 나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나면, 내가 배운 역사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배운 역사와 다르다는 사실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도 틀릴 수 있고, 칼라일이나 매콜리, 트리밸리언 같은 위대한 역사학자들도 틀릴 수 있다. 그들이 논쟁의 불을 지핀 후 남은 재로부터 내가 살 수 있는 세상을 세울 수 있을지도 몰랐다. (373)
●배움을 통해 변화한 타라의 자기 인식과 다짐에 대하여
나는 나의 갈망이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지식, 그리고 나 자신에 관한 수많은 지식들은 내가 아는 사람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내 머리에 심어진 것들이었다. 그 목소리들은 때로는 속삭이고, 때로는 질문을 던지고, 때로는 염려를 하며 평생 나를 따라다녔다. 그 목소리는 내가 옳지 않다고 속삭였다. (...) 어떨 때는 아버지의 목소리였지만, 나 자신의 목소리였던 경우가 더 많았다.(403)
나는 나를 위해 새로운 역사를 썼다. 나는 사냥을 하고, 말을 길들여서 타고, 폐철을 수집하고, 산불을 끈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가진 인기 있는 만찬 손님이 됐다. 산파이자 기업가인 멋진 엄마, 폐철 처리장을 운영하는 괴팍한 광신도 아버지. 나는 마침내 이전 삶에 대해 정직해졌다고 생각했다. 정확한 진실은 아니었지만, 더 큰 의미에서는 진실이었다. <앞으로 펼쳐질> 진실, 미래의 진실에 가까우므로. (...) 과거는 영향을 끼칠 수 없는, 대단치 않은 유령에 불과했다. 무게를 지닌 것은 미래뿐이었다.(424~425)
나는 언니가 한 선택을 두고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같은 선택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그 순간 알고 있었다. 내가 그때까지 해온 모든 노력, 몇 년 동안 해온 모든 공부는 바로 이 특권을 사기 위한 것이었다. 아버지가 내게 준 것 이상의 진실을 보고 경험하고, 그 진실들을 사용해 내 정신을 구축할 수 있는 특권. 나는 수많은 생각과 수많은 역사와 수많은 시각들을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스스로 자신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믿게 됐다. 지금 굴복한다는 것은 단순히 언쟁에 한번 지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그것은 내 정신의 소유권을 잃는다는 의미였다. 이것이 내게 요구되는 대가였다. 이제 이해가 됐다. 아버지가 내게서 쫓고자 하는 것은 악마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다. (471)
그러나 나와 아버지를 가르고 있는 것은 시간과 거리만이 아니다. 그것은 변화된 자아다. 나는 아버지가 기른 그 아이가 아니지만, 아버지는 그 아이를 기른 아버지다. (...) 그날 밤 나는 그 소녀를 불렀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를 떠난 것이다. 그 소녀는 거울 속에 머물렀다. 그 이후에 내가 내린 결정들은 그 소녀는 내리지 않을 결정들이었다. 그것들은 변화한 사람, 새로운 자아가 내린 결정들이었다.
이 자아는 여러 이름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변신, 탈바꿈, 허위, 배신.
나는 그것을 교육이라 부른다. (505~507)
●<배움의 발견> 관련해서 토론해 보고 싶은 거리
이사야 벌린은 자유를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로 구분하여 개념화합니다. 소극적 자유는 외부적 장애와 제한으로부터의 자유로서 개인은 행동하는 것을 물리적으로 방해받지 않는 한 자유롭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적극적 자유란 내적 제한에서 자유로운 상태입니다.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는 것, 스스로를 스스로가 다스린다는 의미입니다. 개인이 적극적 자유를 갖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이성과 감성을 컨트롤할 수 있어야합니다. 비이성적인 두려움이나 믿음, 중독, 미신을 비롯한 모든 형태의 자기 강박에서 자유로워짐을 말합니다.(398~399)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는 것은 역사와 문화, 사회구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개인에게 요구되는 도달 불가능한 환상이자 신화이지 않을까요? 적극적 자유를 지향하되 그 한계와 억압이 효과 등을 인식하며 개인과 개인이 맺는 관계 안에서 비판적으로 재검토하는 과정이 무한히 계속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때로 극복했다고 생각되는 과거의 고통스런 경험이, 때로 예측하지도 못할 사회적인 사건이 자신을 통제하기 어렵게 몰아가는 일도 있지 않을까요? ‘내 정신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을까요? 함께 이야기 나눠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