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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인 척 연기하세요

맑은 물 2022. 5. 2. 08:23

#  책과 삶 이야기  #  와일드 로봇
좋은 책을 읽고 나면 생각이 많아져요. 책을 덮어도 계속 떠오르는 문장이 있다면 그건 아마 내 삶을 건드렸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면 글을 쓰고 싶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지지요.
내일부터 가정의 달 5월이 시작된다는데, 이상하게도 가정의 달은 숙제가 더 많아지는 기분이에요. 나를 이루는 여러 가지 모습 중에 엄마, 며느리, 딸로서의 모습이 유독 도드라지는 것 같아요.
토요일 아침 모처럼 여유가 있어서 마음에 남아 있는 이야기 올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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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싹오싹 팬티』라는 웃기면서도 으스스한 작품으로 아이들을 충격에 빠뜨린 작가 피터 브라운. 자꾸 되돌아와서 어둠 속에서 빛나는 팬티를 보면서 아이들은 웃어야 할 지 울어야 할 지 곤란해하면서도 이야기에 빠져든다. 얼핏 하찮은 것 속에 영혼을 불어넣는 작가의 마법이 빛을 발하는 또 하나의 작품이 바로 『와일드 로봇』이다.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인 로즈가 배달되던 중 사고를 당해 바다에 표류하다 야생의 섬에 당도한다. 야생의 섬에서 로즈는 딥러닝 기술로 동물의 말과 몸짓, 사회적 상호작용을 학습하며 ‘와일드 로봇’으로 살아간다. 그러던 중 로즈는 실수로 기러기들을 죽이게 되고, 부모가 죽은 후 알에서 깨어난 기러기 브라이트빌은 처음 만난 로봇을 제 엄마로 알고 따른다. 그렇게 로즈는 엄마가 된다. 처음에 로즈를 괴물로 여기며 피하던 야생동물들도 로즈를 받아들이게 되고 야생의 섬은 로봇과 동물들이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따뜻한 공동체로 변화한다.
나중에 로즈를 수거하여 폐기 처분하려는 공격 로봇 레코들이 섬에 도착했을 때 동물들은 로즈를 보호하려고 결전을 벌인다. 공격 맞춤형 레코들은 일사불란하게 로즈만을 쫓고 동물들은 목숨을 걸고 합심하여 레코들을 막아내며 로즈를 지켜낸다. 로즈는 어느새 브라이트빌의 엄마에서 모든 야생동물의 엄마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 반 어린이들은 레코들과 동물들이 로즈를 지켜내기 위해 결전을 벌이는 부분이 재미있었다고 말한다. 나 역시 그 부분이 흥미진진하고 감동스러웠다.
그러나 책을 덮은 후 오래도록 마음을 사로 잡은 부분은 따로 있었다. 로즈가 딥 러닝을 통해 브라이트 빌의 엄마로 성장하는 부분이었다.
자기를 엄마로 여기고 따르는 브라이트빌을 두고 로즈는 혼란에 빠진다. 로즈에게는 ‘엄마 노릇’ 매뉴얼이 없었다. 로즈는 늙은 기러기 라우드 윙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녀는 새끼 기러기가 살아남길 원한다면 '엄마인 척 연기를 하라'고 조언한다. 어떻게 엄마인 척해야 할 지 모른다고 하자 그녀가 말한다.
“별거 아니에요. 새끼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 쉴 곳을 마련해 주면 돼요. 안전하게 보호해 주는 거죠.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하되, 지나친 응석은 받아 주면 안 돼요. 걷고, 말하고, 헤엄치고, 날고, 다른 기러기들과 어울리고, 스스로를 돌보도록 가르치면 그게 바로 엄마인 거죠..”
로즈는 라우드 윙의 조언대로 엄마인 척 연기를 하고 어린 기러기는 로즈의 연기에 사랑으로 응답한다.
나는 로즈가 엄마 노릇에 대한 조언을 듣고 수행하는 과정을 보며 뭉클했다. 라우드 윙이 로즈에게 했던 말을 여러 번 떠올렸다. 라우드 윙이 나에게, 인간 엄마들에게 말하고 있다고 느꼈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아이를 돌보면서도 여전히 부족한 엄마라는 느낌에 죄책감이 들었고, 엄마 노릇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아 지레 기운이 빠지기도 했다. 라우드 윙의 조언을 듣는 순간 숨통이 트였다. 그저 엄마인 척 연기하라니. 먹고 마시고 쉬게 해주기, 사랑해주기, 다른 이와 어울리고 스스로 돌보도록 가르치기.
모성애를 타고난 엄마는 없다. 완벽한 엄마가 되려는 부담을 내려놓고 엄마 연기를 꾸준히 하면 된다. 학교 일도 가정일도 잘 꾸려가는 알파우먼이 되고픈 욕구, 내가 이루지 못한 것을 아이가 대신해 줬으면 하는 욕망, 내 아이가 나중에 잘 살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불안을 내려 놓고 말이다.
그러려면 나를 자주 들여다봐야겠구나. 엄마 노릇이라는 이름으로 내 욕구와 욕망과 불안 들에 휩쓸리기 쉬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