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물 2019. 1. 31. 06:59

기억의 문제

 

기억이란 본질적으로 역동적이고 변화무쌍하고 평생 동안 재조직되는 과정이었다. 기억의 힘은 정체성 형성의 핵심이며, 개인으로서의 지속성을 보장한다. 그러나 기억은 변화하기 마련이며, 프로이트만큼 기억의 복구 잠재력’, ‘기억의 지속적인 개정’, ‘기억의 재범주화에 민감했던 사람은 없었다. (올리버 색스, 의식의 강, 알마, 107)

 

삶은 시대를 경과하며 계속되며, 각 시대별로 달성한 정신적 성과를 반영하기 위해 기억은 지속적으로 개정된다네. (올리버 색스, 의식의 강, 알마, 108)

앞서 가는 학교 선생님의 차를 따라서 학교 진입로로 좌회전 신호에 따라 들어갈 때였다. 좁은 진입로 입구에서 빠져나오려 기다리는 차와 부딪치지 않게 차도의 오른쪽으로 붙여서 들어가는 순간 덜커덕 소리가 들렸다. 부딪침을 감지하고 멈춰선 나는 조수석 쪽 옆에 당황한 표정으로 서 있는 아이를 보았다. 아이는 왼쪽 눈 옆을 만지고 있었고 내 차의 사이드 미러는 살짝 뒤쪽으로 젖혀져 있었다. 교장선생님과 보건선생님, 아이의 부모님께 연락하고 바로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응급실에 들어가 2시간여를 기다린 끝에 CT와 엑스레이를 찍었고 결과적으로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아이는 응급실에서 진료를 기다리는 동안 오가는 환자들을 보며 질문을 퍼부어댔고, 작은 응급실 대기 의자에서 누웠다 앉았다 일어섰다하며 부산스레 움직였고, 손목팔찌에 새겨진 환자 바코드에 따라 열리고 닫히는 문이 신기하다며 자동문을 열고 닫으며 돌아다녔다. 진료를 마친 후에 늦은 점심으로 김치우동과 돈가스 세트를 쉼 없이 먹어대더니 학교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는 늘어져서 낮잠을 잤다. 잠든 아이의 숨소리를 들으며 아침에 아이와 부딪쳤던 순간 느꼈던 당황스러움과 두려움, 놀라움과 공포, 응급실에서 진로를 기다릴 때의 피로함과 지루함, 걱정 등이 잦아들고 있음을 느꼈다. 학교에 오자마자 아이는 돌봄교실로 뛰어 올라가 친구들과 레고팽이를 돌리며 놀기 시작했고, 아이의 엄마는 월요일 아침부터 선생님이 많이 놀라셨겠다고, 고생하셨다고 답 문자를 보내왔다.

불행 중 다행이라며 마음을 쓸어내리는 와중에 예전의 교통사고가 떠올랐다. 5년 전 봄, 중앙선을 침범해서 마주 달려오는 소형차를 정면으로 들이받았다. 두 차를 모두 폐차시키고 소형차 운전자는 전치 9주의 부상을 입힌, 변명의 여지없이 내가 일으킨교통사고였다. 운전면허가 정지되고 법원에서 부과된 범칙금을 물었으며 교육청으로부터 수 개월간 근무지이탈과 교통사고 중대과실로 감사를 받고 징계를 받았다. 무엇보다도 나를 고통스럽게 했던 건 내가 누군가의 몸에 크나큰 고통을 주었다는 죄책감과 자칫 잘못했으면 사람을 죽일 수도 있었다는 공포감이었다. 그런 나를 위로해주었던 건 오히려 사고를 당한 그 운전자와 그녀의 남편이었다. 아기 엄마가 일부러 사고를 내려고 그런 것도 아니고, 내 몸은 병원이 잘 치료해줄 것이니 이 사고는 빨리 잊으라고 했다. 이번에는 내가 사고를 당했지만 다음에 사고를 낼 수도 있는 거고, 큰 사고에 비해 이만한 것도 다행이라고 했다. 택시기사였던 그 운전자의 남편은 보상금을 요구하는 대신, 역지사지의 지혜를 보여주며 사고를 당한 아내를 다독였다.

불행 중 다행. 나는 내 삶이 항상 이전보다 더 나아졌고 앞으로 더 나아지리라 믿고 있다. 이 믿음의 근거가 무엇일까? ‘기억은 정체성 형성의 핵심이자 개인의 지속성을 보장하는 것으로서 복구되고 현재의 성과를 반영하여 재구성되고 재범주화 된다는 올리버 색스의 문장을 읽고 무릎을 쳤다. 나는 내게는 행운이 따른다는 믿음에 맞는 기억들만 선택했거나, 그 믿음에 맞게 기억들을 변형했거나, 의미를 부여했다. 불행을 행운으로 모면하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불행과 실패에서 배우며 강하고 깊어진 사람으로 내 정체성을 만들어왔다. 한편, 현재 내 삶이 지난 과거의 수많은 기억들 중 좋은 기억들만 불러들여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고 있기도 하다. 이를 리베카 솔닛은 현재가 과거를 재배치한다고 표현했다.

 

삶은 온갖 사연으로 가득한 은하수 같은 것이고 우리는 지금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지에 따라 그때그때 몇 개의 성운 고를 수 있을 뿐이다.” (리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 반비, 359)

이렇게 보면 운전을 하다 문득, 봄 햇살 나른 한 오후에, 잠들기 전 소란스러운 머릿속에 튀어오르는 기억들이 어떤 것들인가를 기록하는 것은 과거를 불러들이는 것이 아니라, 현재 내 삶을 서술하고 묘사하는 일이다. 그 안에는 내 생각과 의지, 욕망이 있고, 현재를 구성하는 객관적인 삶의 조건과 주관적인 해석이 있다. 과거로부터 지속되어 왔고 현재를 이끌어가며 미래에 영향을 주지만, 앞으로도 변함없이 지속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내가 서 있는 유동적인 좌표를 확인하고 흔들리면서도 어쨌든살아가기 위해 기억은 소환되고 저장된다.

(2018327일 화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