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모으기/문장들 : 2016~2018

『멀고도 가까운 –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 김현우 옮김/ 반비 / 2016)

맑은 물 2019. 1. 30. 11:39

 

 

사람들은 어떤 장소에 대한 본인의 애정을 이야기하지만, 장소가 되돌려 주는 사랑, 장소가 우리에게 주는 것에 대해서는 좀처럼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p.52)

 

세상이 크다는 사실이 구원이 된다. 절망은 사람을 좁은 공간에 몰아넣고, 우울함은 말 그대로 푹 꺼진 웅덩이다. 자아를 깊이 파고들어 가는 일, 그렇게 땅 밑으로 들어가는 일도 가끔은 필요하지만, 자신에게서 빠져나오는 일, 자신만의 이야기나 문제를 가슴에 꼭 붙들고 있을 필요가 없는 탁 트인 곳으로, 더 큰 세상 속으로 나가는 반대 방향의 움직임도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양쪽 방향 모두로 떠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며, 가끔은 밖으로 혹은 경계 너머로 나가는 일을 통해 붙잡고 있던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일이 시작되기도 한다. (p. 53)

 

도서관은 이상적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지만 일어났던 모든 일이 저장되어 기억되고 삶을 되찾는 장소, 종이가 가득한 상자에 세상이 차곡차곡 담겨 있는 곳이다. 책 한 권 한 권이 다른 세상으로 이어지는 문이며, 어린이 책에서 마법이라는 것도 그에 대한 비유일지 모른다. 도서관은 세상으로 가득 찬 은하수다. 모든 독자가 우다오쯔이며, 상상력으로 마음을 사로잡는 모든 책은 독자가 그 안으로 사라지는 풍경이다. (p. 99)

 

우리가 책이라고 부르는 물건은 진짜 책이 아니라, 그 책이 지닌 가능성, 음악의 악보나 씨앗 같은 것이다. 책은 읽힐 때에만 온전히 존재하며, 책이 진짜 있어야 할 곳은 독자들의 머릿속, 관현악이 울리고 씨앗이 발아하는 그곳이다. 책은 다른 이의 몸 안에서만 박동하는 심장이다. (p. 99)

 

글쓰기는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두에게 하는 행위이다. 혹은 지금은 아무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훗날 독자가 될 수도 있는 누군가에게 하는 행위이다. 너무 민감하고 개인적이고 흐릿해서 평소에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말하는 것조차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를. 가끔은 큰 소릴 말해 보려 노력해 보기도 하지만, 입안에서만 우물거리던 그것을, 다른 이의 귀에 닿지 못했던 그 말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적어서 보여줄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글쓰기는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침묵으로 말을 걸고, 그 이야기는 고독한 독서를 통해 목소리를 되찾고 울려 퍼진다. 그건 글쓰기를 통해 공유되는 고독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눈앞의 인간관계보다는 깊은 어딘가에서 홀로 지내는 것 아닐까? 그것이 둘만으로 구성된 관계일지라도. 말이 전하기에 실패한 것을 글이, 아주 길고 섬세하게 전할 수 있는 것 아닐까? (p. 100)

 

나병은 신경을 짓눌러 아무런 감각을 느낄 수 없게 만들 뿐이고, 그렇게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되면 환자들은 그 부위를 돌보지 않게 된다. 피부를 상하게 하는 것은 병이 아니라 환자 본인이다. 스스로가 제 손가락과 발가락, , 손을 베이고, 화상을 입고, 멍들게 하고, 벗겨지게 하다가, 결국 그 부위를 잃게 되는 것이다.

고통에도 목적이 있다.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느낄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돌보지도 않는다.’ (p. 151)

 

고통은 그 사촌 격인 촉각과 함께 온몸에 퍼져 있어, ‘자아의 경계 역할을 한다. (p.156)

 

고통이 몸의 경계를 정하는 것이라면 당신은 감정을 이입함으로써, 그들의 고통에 함께 아파함으로써, 어떤 사회 구성체의 일부가 되는 셈이다. (p. 157)

 

어떤 감정이입은 배워야만 하고, 그다음에 상상해야만 한다. 감정이입은 다른 이의 고통을 감지하고 그것을 본인이 겪었던 고통과 비교해 해석함으로써 조금이나마 그들과 함께 아파하는 일이다. (p. 157)

 

동일시라는 말은 나를 확장해 당신과 연대한다는 의미이며, 당신이 누구와 혹은 무엇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느냐에 따라 당신의 정체성이 구축된다. 신체적 고통이 자아의 신체적 경계를 정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동일시는 애정 어린 관심과 지지를 통해 더 큰 자아라는 지도의 경계선을 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정신적 자아의 한계는 더도 덜도 말고, 딱 사랑의 한계다. 그러니까 사랑이 확장된다는 이야기다. 사랑은 끊임없이 뭔가를 덧붙여 가고, 가장 궁극적인 사랑은 모든 경계를 지워버린다. (p. 158)

 

자아의 경계가 당신이 느끼는 것에 의해 정해진다면, 자신을 느낄 수 없는 사람들은 그들의 경계 안에서 수축할 것이다. 반면에 다른 이의 것까지 느끼는 이들은 확장할 것이며, 모든 존재에 공감하는 이들의 경계는 아예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분리되어 있지 않고, 홀로 있지 않으며, 외롭지 않고, 우리 자신이라는 섬에 발이 묶여 버린 이들과 달리 취약하지 않다. (p. 158~159)

 

슬픔은 늘 거리와 공간을 가지고 우리를 어디론가 데려가는 반면, 최상의 행복은 바로 이 순간 이 자리에서 마치 집에 있는 것 같은 평온함을 느끼게 한다. 그렇다면 슬픔과 행복은 각각 멀리 있는 것과 가까이 있는 것에 대한 감정일지도 모른다. (p. 207)

 

익숙한 동화들은 결말에 이르러 제한된 가능성만을 보여 준다. 그 이야기들은 대부분 무엇을 얻는 것으로 끝난다. (중략) 그런 이야기에서 다른 방식으로 사는 삶, 다른 기준으로 측정된 삶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인가? 목표가 중요하다. 불교의 기초가 되는 반석, 즉 붓다의 삶은, 거꾸로 흘러가는 동화이다. (p. 218~219)

 

그런 단절의 순간, 깨어남의 순간이자 삶의 방향이 바뀌는 순간을 경험하는 이들이 많다. (p. 223)

 

이 순간은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며 우리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손님처럼 찾아온다. 그 손님은 때로는 안내인처럼 친절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과거의 시간을 모조리 부숴 버리고 우리를 문밖으로 난폭하게 밀어내기도 한다. 우리는 그런 순간에 반응하고, 그 반응이 바로 그 순간 이후에 살아가게 될 삶이다. (p. 223~224)

 

불교에서 말하는 차가움은 무관심이 아니라 감정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 소란을 관조할 수 있는 조용한 공간을 의미한다. 거리를 두고 보면 어떤 법칙이나 관련성을 보게 되고, 대상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p. 251)

 

불교에서 정신의 낙원을 뜻하는 나르바나는 촛불이나 불꽃을 불어서 끄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단어다. 그건 열정이 가진 열기를 끄는 것, 숨을 길게 내쉬며 흘려보내는 상태를 의미한다. (p. 252)

 

먼 거리를 작은 공간에 압축시켜 놓았다는 점에서 미로는 인간이 만들어 낸 다른 두 고안물과 닮았다. 하나는 실타래고, 다른 하나는 단어와 문단과 쪽을 하나로 묶어 놓은 책이다. 책의 문장이 실타래에 감긴 한 가닥의 실이라고, 그 문장도 실처럼 풀 수 있는 것이라고 상상해 보자. 그렇게 풀린 문장이 만들어 낸 선 위를 걸을 수 있다고, 실제로 걷고 있다고 말이다. 독서 또한 하나의 여정이다. 눈은 선처럼 펼쳐진 생각을 따르고, 책이라는 압축된 공간에 접혀 있던 그 생각들이, 당신의 상상과 이해 안에서 다시 차근차근 풀려 나간다. (p. 278)

 

듣는다는 것은 귓속의 미로에서 소리가 사방으로 돌아다니게 허락하는 것이며,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거꾸로 그 길을 되돌아서 그 소리를 만나는 것이다. 이것은 수동적이기보다는 능동적이다. 이 듣는다는 행위 말이다. 이는 당신이 각각의 이야기를 다시 하는 것, 당신의 고유한 언어로 그것을 번역하는 것, 당신이 이해하고 반응할 수 있게 당신의 우주에서 그 자리를 찾아 주는 것, 그리하여 그것이 당신의 일부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감정이입을 한다는 것은 감각의 미로를 통해 들어온 정보를 맞아 주기 위해 손을 뻗는 것, 그것을 껴안고 그것과 섞이는 일이다. 즉 타인의 삶이 여행지라도 된다는 듯 그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p. 284)

 

가끔 멋진 일이 생기고 난 직후에 삶을 되돌아보면, 인생에서 운이 좋았던 일들이 산맥으로 이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끔찍한 일이 생긴 후에 되돌아보면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다. 현재가 과거를 재배치하는 것이다. 삶 하나는 이야기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완성된 이야기를 전하기란 절대 불가능하다. 삶은 온갖 사연으로 가득한 은하수 같은 것이고 우리는 지금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지에 따라 그때그때 몇 개의 성운 고를 수 있을 뿐이다. (p. 359)

 

(2016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