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자기가 어떻게 절망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를 알면 그 절망 속에 살아갈 수 있다”는 벤야민의 말을 나는 시를 통해 이해했다.
내가 구상하는 좋은 세상은 고통이 없는 세상이 아니라 고통이 고통을 알아보는 세상이다. (12)
“여성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자아가 있다면 그것은 역설적으로 아무런 이익도 추구하지 않고 스스로를 탈고유화할 수 있는는 능력일 것” (엘렌 식수) (...) 싸울 때마다 투명해지는 모든 존재들의 ‘탈고유화’의 여정 위에 이 책을 내려놓는다. (12~13)
결혼도 이혼도 인연을 쓰는 한 방편일 뿐이다. 플라톤의 말대로 무엇이든 그 자체 단독으로 아름답거나 추하지는 않다. 그것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실천의 미이고, 그것을 추하게 만드는 것은 실천의 비열함이다. 이혼도 그런 것 같다. 비열한 이혼도 아름다운 이혼도 있다. 그러니 권장할 일도 배척할 일도 아니다. 삶 전체를 위한 합리적인 골격을 짜는 하나의 과정으로 아픈 선택일 뿐이다. 삶의 어느 국면에서 생을 담은 물이 심하게 흔들리는 것. 단지 그것뿐이다. (24)
모든 물음은 질문자의 입장과 욕망을 내포하는 법이다. (...) 자기 욕망을 일인칭 시점에서 구사할 수 있는 언어는 여전히 모자라다. (36)
김제동의 말은 많은 여성을 치켜세우고 남자를 비하하는 듯하지만 아니다. 한 사람을 보살피는 것은 한 우주를 헤아리는 일이다. 친밀성 능력, 정서적 육체적 노동이 다 투여된다. 두 사람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왜 한쪽이 도맡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가족도 학교도 못한 ‘사람 만들기’를 한 개인이 할 수 있을까. 왜 스스로 사람이 되라고 말하지 않고 관계에의 무임승차를 권유할까. (42)
“여성이 상위 종족”이라는 표현은 권력의 말이다. 노동자를 산업의 역군이라 명명하고 착취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한쪽의 수고로 한쪽이 안락을 누리지 않아야 좋은 관계다. (44~45)
나중에 알고 보니 못 본 척하는 게 아니라 아예 안 보이는 거다. 대대손손 소통 불능의 장애를 겪는 남성들. 그렇게 살아도 삶이 유지됐으므로 타인의 심정을 헤아리는 능력이 퇴화한 것이다. (58)
한 사람이 이 정도 지적 과업을 달성하기까지 동시간대에 이루어졌을 칠백 그릇 이상의 밥을 지은 한 사람의 ‘그림자 노동’이 아른거렸다. (59)
여자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상대방의 감정과 기분을 맞춰주고 배려하도록 키워진다. 문제를 터뜨려서 해결하는 분란보다 나 하나만 참으면 유지되는 평화가 익숙하다. 그렇게 신생아 유기범이 된다. (69)
출산은 성스럽지만은 않다. 아이는 모성의 힘을 낳는 게 아니라 제 스스로의 힘으로 뚫고 나온다. 그리고 낯선 존재의 출현은 공포와 위험으로 다가온다. (70)
“미친년 널뛴다는 말은 폭력적이다. 미친년을 미치게 만든 미친놈들의 존재가 생략되었기 때문이다.” (75)
성범죄자는 낯선 남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그간 내가 만난 성폭력 피해 여성들의 가해자는 거의 친족, 직장 동료, 고용주, 교사, 친구 같은 일상을 공유하는 사람이다. (아는 사람에 의한 피해가 81%) (79)
진실은 말하는 데 있는 게 아니다. 듣는 데 있는 것이다. 말할 권리 the right to speak 와 들릴 권리 the right to be heard 는 영어로 같은 표현이라고 하지 않다. 그러니 집집마다 당도해야 할 것은 가해자의 신상 명세가 아닌, 피해자의 들릴 권리가 담긴 서툰 말이다. (81)
평범함.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경험하지 않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라는 일본의 사회학자 기시 마사히코의 말대로, 나는 ‘그것’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난 평범하지 않았던 것이다. (114)
삶의 길이보다 삶의 밀도가 중요해졌다. 사는 동안 존재를 확장하려는 노력은 멈출 수 없겠지만 순한 양처럼 주어진 시간에 복종하고 싶다. 어디로든 끝 간에는 사라질 길. 그저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139)
삶의 속도 개선. 결에 따라 섬세하게 살피고 헤아려서 어떤 일은 느린 가락으로 어떤 건 빠른 템포로 살아야 한다. (150~151)
동정이든 차별이든 그 아래 깔린 근본 생각은 다르지 않다는 걸. 어떤 대상을 자기 삶의 반경에 없는 분리된 존재로 취급하는 것(고아들이 불쌍하다), 한 존재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 중 특정한 면만 부각시켜 인격화하는 것(장애인은 무능하다), 자신은 결코 되지 않을 이질적 대상으로 상대를 보는 것(공부 안 하면 노숙인 된다). 하나같이 타자화하는 말들이다. (169)
삶에 대한 상상력이 직업에 대한 정보력을 넘지 못하는 수준이다 보니,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사람의 이야기는 사라져간다. (...) 그런데 남에게 자기 얘기를 하지 않으면 사람은 자기를 알기 어렵고 사회에 자신을 위치 지을 수도 없다. 말소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아마도 사람을 단정하는 내 ‘꾸준한 고집’으로 눈앞에서 놓쳐버린 무수한 타인들이 있을 것이다. 다시 듣기를 시도한다. 저마다 처지와 형편과 고민을 말하고 듣고 상상하는 동안 서로의 존재 정착을 도우리라. (170)
얼마 전 공개된 홍상수와 김민희의 연애 소식을 나는 스크린 바깥으로 흘러넘친 영화라고 보았다. 그들이 일에서 보여준 존재감 그대로다. 길들여지지 않는 눈빛을 가진 배우다웠고 영화와 현실을 뒤섞는 능청스러운 감독다웠다. 역시 어느 시대나 다르게 살 수 있는 사람은 다르게 사는구나 싶었다. 안전한 삶보다 모험적 사랑에 존재를 던지는 선택은, 지리멸렬한 관계의 파고를 넘는 평범한 삶만큼 존중받고 보존되어야 할 사랑의 역사가 아닌가. (...) 결혼도 이혼도 인연의 방편이자 나은 삶을 위한 선택이라고 여기면서도 삶의 관성을 깨지도 못하고 사랑의 물음을 놓지도 못하고 나는 살고 있다. 좋은 영화, 좋은 문학이 품어온 사랑과 자유의 가치가 일상의 감각으로 승인되는 일은 요원할까. (198)
“먼저 엥겔스가 되어주세요. 그럼 엥겔스 같은 친구가 생길걸요.” (...) 그런 사람을 알아보려면 같은 층위를 맴돌아야 한다. 같은 지평에 머물러야 한다. 그래야 마음의 길이 열리고 생각이 통하여 서로를 보듬고 키울 수 있다. 마르크스는 엥겔스를 만들고, 엥겔스는 마르크스를 만드는 선순환이 일어난다. (203~204)
마음의 창을 활짝 열어두어야 빛과 바람과 사람이 드나든다. 현실계에서 사랑의 감정을 작동해보고 연애 감각을 키우는 훈련은 중요하다. 감성의 샘이 마르지 않도록 부지런히 펌프질해야 마음의 온도가 맞고 인식의 전류가 통하는 좋은 반려자를 만날 수 있다. (205)
니체는 악행을 권한다. 속 좁은 생각을 하느니 차라리 악행을 저지르는 게 낫다고 한다. 행위의 과정에서 문제를 터뜨리고 해결해주고 다른 지평이 열리기 때문이다. 또 작은 악행의 쾌감이 큰 악행을 막아준다고 했다. 더 엄밀히 말하면 니체에게는 악행도 선행이다. “악행과 선행 사이에 종류의 차이란 없다. 기껏해야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삶의 유용성 전략에 따라 이뤄진다. 악행과 선행은 동일한 뿌리에서 나온 것으로 어떤 상황에서는 복수, 악의, 교활 같은 악한 모습을 하고 어떤 상황에서는 동정, 희생, 인식의 선한 모습을 띤다고 본다. 니체에는 ‘행-하기’ ‘의욕-하기’가 중요하다. 자기 보존은 죽어 있는 상태이며, 살아 있는 것은 본디 주인이 되고자 하고 더 강해지기를 원하는 의지 작용을 일으킨다는 것. 일명 ‘힘에의 의지’로 니체는 세계의 작동 원리를 설명한다. (231~232)
돈의 쓰임이 곧 삶의 자세이다. (...) 돈이 기준이 되면, 삶의 만족을 돈 아니면 채우기 힘들고 적은 돈으로 행복을 창안하는 일에 무능해진다. 또 그런 일터에는 비슷한 가치와 기운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다. 이 또한 중요하다. 인생의 벚꽃 시절을 누구와 보내는가 하는 문제 말이다. 행복은 결코 혼자 달성할 수 없다. 그래서 에피쿠로스도 “너는 무엇을 먹고 마실까보다 누구와 먹고 마실까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 인생의 꽃 시절은 짧고, 삶은 예상했던 것보다 오래 지속된다. (237~238)
“돌봄은 우주를 돌고 돈다고 하죠.” 니체가 남을 동정하고 연민할 때는 섬세한 기예가 필요하다고 말했는데, 이런 거였다. (...) 신세 한탄은 그만하고 나의 돌봄은 어디를 어떻게 향해야 하는가를 연구해야겠구나 마음 다잡았다. (256)
누구나 지금이 존재의 최선이다. (262)
“친절하라, 당신이 만나는 모든 이들은 힘든 싸움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 터이니.” (R. J. 팔라시오, 『아름다운 아이 줄리안 이야기』 중)
농부처럼 허리 굽혀 씨 뿌릴 때 무언가 자라났다. 그리고 누가 누구에게 ‘좋은 무엇’을 말로써 가르칠 수는 없다. (...) 타자를 변화시키는 힘은 계몽이 아니라 전염이다. (275)
“배울 때 기쁨을 느끼지 않는 자는 가르쳐서는 안 된다. 무언가 다른 것에 열중하는 것, 사랑하는 것, 배우는 것, 그것은 같은 것이다.” (파스칼 키냐르의 《은밀한 생》 중) (276)
(2019년 1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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