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그대로 들여다볼 용기가 없는 사람은 판타지라는 안경을 쓴다. 판타지에 의존하는 한 우리의 삶은 진실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김원영은 자신의 삶을 판타지에 의존해 들여다보지 않는다. 자신의 삶과 오롯이 대면하는 순간을 겪고 난 이후의 사람에게서 보이는, 감히 위엄이라고 말할 수 있는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 삶을 회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대면한 후에 쓴 텍스트에는 논리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무게와 깊이를 담은 진심이 있다. (...) 이 책은 삶으로 쓴 텍스트이다. 나는 삶으로 쓴 텍스트를 사랑하고 심지어 존경한다. - 노명우 (5)
우리는 타인이 인생에서 맞닥뜨린 장애물들을 나 자신은 피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과연 언제까지 피할 수 있을까? 인생의 어떤 길목에서 우리 역시 한 번은 걸려 넘어지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이미 걸려 넘어졌는데 그렇지 않은 척 애써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건 아닐까? ‘실격당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말이다. 이 책은 실격당했다는 낙인을 두려워하는 모두를 위한 책이다. 김원영의 변론을 통해 우리는 넘어진 삶을 읽으키는 법, 스스로를 비난하지 않고 계속 걸어가는 법을 배운다. - 김현경 (6~7)
들어가며 - 잘못된 삶과 좋은 만남
‘잘못된 삶’ 소송은 장애를 가진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나았다는 생각으로 산부인과 의사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민사소송의 한 유형이다. (...) 장애아의 출생은 엄청난 의료비 부담, 주위의 낙인,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돌봄 노동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8~9)
(...) 자식은 부모의 기획에 따른 결과물이 아니라 긴 시간 수많은 관계와 사건을 통과하며 부모와 만나는 독립된 존재다. (...) 출산과 동시에 만나는 것이 아니라, 점차 한 사람의 개인으로 성장하고, 확장되고, 여러 가지 경험을 축적하고 체화하면서 하나의 인격체로서 부모를 만나는 것이다. 부모 또한 자녀와의 관계 속에서 변화한다. (...) 부모 역시 자녀와 ‘만나가는’ 것임은 틀림없다. (9)
어떤 인간 집단, 특정한 처지에 놓인 사람을 잘못된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관념은 (...) 모든 일상의 태도, 관념, 제도와 법규범이 ‘잘된 삶’과 ‘잘못된 사람’을 가른다. (...) 내가 어떤 삶을 택하든 나는 이 ‘잘된 삶’과 ‘잘못된 삶’의 거대한 구별짓기에 늘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13)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 다른 사람들과 상호작용하고, 자신만의 인생 이야기를 써나가며 고유한 개인으로 성장하여 더 밀도 높은 인간이 된다. (13)
고유성을 존중받지 못하는 인간은 흐릿하게만 기억되고, 번호나 기호로만 존재하며, 특정한 장애나 성적 지향, 성별, 인종 등으로만 호명된다. (13~14)
존중이란 개별자로서 그 사람을 대우하고 승인한다는 의미다. (14)
요컨대 ‘잘못된 삶’이란 (...) 존중받지 못하는 삶, 하나의 개별적 존재로 인정받지 못하는 실격당한 삶이다. (...) 이들은 자기 삶의 이야기를 최선을 다해 작성해나가는 ‘삶의 저자 author’들이지만, 이들을 배제하고 밀어내고 낙인찍는 사회적 관행과 정치적 힘, 그리고 자기 존재를 발전, 확장, 농축할 기회를 부여하지 않는 정치경제적 구조 때문에 ‘잘못된 삶’이라는 낙인을 안은 채 사회 밖으로 밀려난다.
다른 한편, ‘매력 자원’이 크게 부족한 경우에도 우리는 잘못된 삶으로 향하기 쉽다. 타인에게 아무런 매력도 보이지 못하는 사람은 도덕과 법규범에 의지해 일정한 존중은 받을 수 있지만, 진정으로 타인과 깊숙이 연결될 기회를 갖기는 어렵다. 인간은 모두 아름다움에 취약하다. (...) 결국 우리에게는 각자가 가진 생생한 고유성과 숨겨진 ‘아름다움’을 전개할 무대와 관객이 필요하다. (15)
1장 노련한 장애인
노련함에는 단계가 있다. 첫째, 자시의 몸이 가진 기능적 한계를 몸의 다른 기능으로 대체하는 기술과 아이디어를 갖는 것이다. (...) 노련한 사람들은 현실감 없는 극적 서사에 모험을 걸기보다 상황을 통제하는 우아함을 택한다. 둘째 단계의 노련함은 상호작용의 기술에 있다. (...) 물론 우리의 삶이 저 두 종류의 노련함으로 깔끔하게 돌파 가능할 만큼 허술하지는 않다. (25~27)
노련함의 가장 고차원적 단계는 바로 이 모든 모욕적 대우로부터 자아를 보호하는 기술이다. (32)
우리가 장애나 질병, 또는 ‘핵토’라고 취급되는 내 신체의 외양과 기능이 주는 각종 한계와 멸시에 노련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고도로 성찰적인 자아를 가져야 한다. 이 자아는 타인의 시선을 날카롭게 감지하고, 그 시선이 나에게 꽂히는 순간 그 의미를 분별하며, 그것이 자아의 본질로 공격해 들어올 때 진지를 구축한다. 성찰성을 발휘하면 ‘보여지는 나’가 앞장서서 능숙하고 효과적으로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때로는 냉정하게 분노를 전개하는 변론자의 배역을 수행한다. 성찰성은 사회적 상호작용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노련함의 근본조건이다. 어떤 경우에서는 이 성찰 능력을 잃지 않는 기술은 모욕과 수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고도의 테크닉이다. (...) 이는 삶을 게임처럼 대하는 태도다. 삶의 모든 순간은 일종의 공연(퍼포먼스)이 된다. (35~36)
인간은 신체를 훼손당할 때 인격체로서의 존엄성에 큰 타격을 입는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개인이 가진 고유한 이야기, 특유의 욕망과 선호, 자율성으로 구성되는 개별적 인격성을 인정받지 못할 때도 사회적 존재로서의 존엄성을 크게 훼손당한다. 장애, 질병, 빈곤 등으로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을 자신의 목적을 실현할 수단으로 삼아 철저히 익명화하는 방식으로 연출하는 공연은 결국 이들을 실격당한 존재로 만든다. (44)
2장 품격과 존엄의 퍼포먼스
우리는 각자가 왜 그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존엄한 존재인지 잘 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일상에서 상대방을 존중하고 그에 화답하는 상호작용, 즉 ‘존엄을 구성하는 퍼포먼스’를 실천하고 있다. (65)
타인이 나의 반응에 다시 반응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타인을 존중하게 되며, 나를 존중하는 타인을 통해 나 자신을 다시 존중하게 된다. 철학자 토머스 네이글은 인간만이 갖는 고유한 성적 끌림을 상호작용을 통한 성적 흥분의 상승으로 묘사하는데, 나는 이것이 상대방을 존중하면서 확장되는 존엄의 구축과정과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67)
품격이 상대방을 적절하게 접대하는 연기에 의해 구성된다면, 존엄은 상대를 환대하고 그 환대를 다시 환대하는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된다. 우리가 본래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게 서로를 대우한다기보다는 그렇게 서로를 대우할 때 비로소 존엄이 ‘구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71)
3장 우리는 사랑과 정의를 부정한다
타자의 시선으로 나를 보는 것을 완전히 부정하고 오로지 자신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결국 나의 몸, 운명, 삶, 실존에 대한 수용을 전제로 한다. (91~92)
4장 잘못된 삶
스타일의 추구는 자신을 ‘무엇이 아님’이라는 결여가 아니라 ‘무엇임’이라고 적극적으로 규정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124~125)
우리는 수평적 정체성을 가진 다른 존재들과 연결될 때에만 정상성의 결여로서의 내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존재’인 자신을 인식하는 정신의 스타일을 구축할 수 있다. (128)
5장 기꺼운 책임
장애의 ‘수용’은 실천적 선택이라는 맥락에 국한되며, 어떤 상황에서든 장애는 고정된 정체성의 일부라 고집하는 ‘믿음’과 다르다. (146)
정체성이란 객관적인 대상처럼 존재하는 어떤 산물이 아니다. 정체성이 귀중한 이유는 우리가 각자의 인간적 상황에 맞서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수행적 가치’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 우리가 수평적 정체성으로서 옹호하고자 하는 장애나 질병, 너무 크거나 작은 키, 인종, 특정한 정신질환, 성적 지향 등은 한 사람이 어떤 경험과 도전에 맞서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간 역사가 체화된 인간적 속성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147~148)
“개인의 정체성의 핵이 더 이상 이런 요소들이 아니라, 그것들을 바탕으로 정체성 서사를 써나가는 주체의 저자성authorship 자체임을 뜻한다. 정체성에 대한 인정은 특정한 서사 내용에 대한 인정이 아니라, 서사의 편집권에 대한 인정이다. ” (149,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215쪽)
정체성의 수용에 성공한다면, 그는 장애와 질병으로 인한 정신적, 신체적 특질을 가지고 살아갈 자기 삶에 대한 책임을 부담할 것이다. 여기서의 책임이란 (...) 자신이 부자유하고, 가치 없고, 존엄하지 않은 존재로 여겨지는 상황에 책임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의 존엄을 위해 투쟁한다. 자기 몸과 정신이 부여한 자연적 경향성을 인정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윤리적 책임은 버리지 않는다. (153~154)
6장 법 앞에서
우리가 과거 인생을 돌아보며 구축한 가상의fictional 자아는 그 이야기의 일관성, 통합성을 유지하기 위해 미래의 우리 선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우리가 스스로 만든 자기 서사의 신뢰성을 위해 그에 맞춰서 행동하고 살아간다면, 가상으로만 존재하던 자아는 실재reality가 된다. (180~181)
어떤 사람을 존엄한 존재로 대우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자기 인생의 자율적인 형성 주체, 말하자면 작가/저자author로서 존중함을 의미한다는 견해가 있다. 이는 현대 입헌민주주의 국가의 헌법 질서가 인간의 존엄을 정의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입장이다. (185)
자기 이야기를 자율적으로 써 내려가는 자기 인생의 저자라는 개념은 우리 모두가 각자 고유한 이야기와 관점을 가진 개별적인 존재임을 강조한다. 우리가 차별로부터 보호되어야 하는 이유 역시 우리가 가진 고유성, 자기 삶을 직접 작성하는 저자성authorship이 침해되기 때문이다. 이때의 ‘작성’이란 자기 삶의 경로를 자율적으로 선택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자신이 걸어온 길들을 돌아보며 스스로 해명(설명)하면서, 자기 선택을 반성적reflective으로 밀고 나가는 행위까지 포함한다. (185~186)
“필요한 것은 심사가 아니라 논의와 대화이다. 현재의 제도에서 장애 당사자는 대화의 주체가 아니라 관찰의 대상으로 전락해 있다. (...) 필요한 것은 대화의 형식이다. 왜 장애 당사자가 무엇을 얼마만큼 필요로 하는지 직접 말하게 하지 않는가? 왜 당사자가 자기 자신을 더 풍부하고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질문을 고려하지 않는가?” (188, 장혜영, ‘활동보조 등급심사, 전기밥솥으로 밥을 할 수 있냐구요?’ <비마이너> 2017. 9. 25)
보르톨로티 등 몇몇 학자들도 정신질환에 따른 망상이나 작화가 개인의 저자성을 불가능하게 만들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이 자기 삶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을 계기로 어떤 이야기를 구성하고, 그 이야기가 그 사람이 앞으로 할 행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면 그는 자기 삶의 저자로서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194)
창조된 각자의 서사는 위계 관계에 놓이지 않는다. (196)
문제는 이 저자성을 알아보는 다른 사람들의 능력과 감각이며, 이 다소 ‘특별한’ 저자의 권리를 법이 어떻게 존중할 것인가이다. (198)
켄지 요시노는 현대 사회에서 장애인, 소수 인종, 성적 소수자 등을 대놓고 차별하고 배제하는 일은 많이 없어졌지만, 이 사람들에게 주류 집단에 동화同化되기를 요구하는 이른바 ‘커버링covering’ 압력이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커버링은 말하자면, 자신이 가진 비주류적인 특성을 ‘티 내지 말라’는 요구다. (...) 커버링에 대한 법적인 대응 방법을 고민하면서, 그중 하나로 ‘논리적 근거를 강제하는 대화’를 제안한다. (197)
장애를 수용하여 자기 존엄성을 긍정하는 일은 결국 중증 정신적 장애인 일부에게는 애초에 불가능한 작업이 아닌가? (...) 우리가 ‘공동 저자’가 될 가능성을 생각할 수는 없을까? (203)
‘공동의 서사 쓰기’를 위해서 우리는 중증의 장애를 가진 사람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삶을 같이하는 이들의 이야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이들이 경험한 공생共生을 위한 갈등과 협력, 때때로 찾아오는 경이로운 순간들, 장애인을 한 사람의 자녀로, 또래로 온전히 받아들인 시간은 그 자체로 고유할 뿐 아니라, 중증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개별자로서의 이야기를 이전과는 다른 관점에서 드러내줄 것이다. (204)
7장 권리를 발명하다
특정한 세계관은 내밀하고 조용히 세상에 퍼져가다 어느 시점에 이르면 권리의 언어로 結晶결정되어 사람들의 말에 담긴다. 말은 흐르고 흘러 눈앞에 등장하고, 몸에 감촉되는 ‘물질’이 된다. (217)
이동권 투쟁의 역사가 보여주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요소는, 장애인이 이동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시위 과정 자체가 장애인을 자꾸 이동시켰다는 점이다. (...) 권리를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 자신의 신체나 정신 혹은 처한 사회적 상황의 문제를 권리의 언어로 표현하고 집단적으로 공유하고 법제도 안으로 진입시켜 실질적인 힘을 갖도록 정치적, 도덕적, 헌법적 의미를 부여하는 활동 자체가 ‘잘못된 삶’들의 존엄성이 사회적으로 승인되는 과정이다. (권리 주장의 수행적 성격) (231)
8장 아름다울 기회의 평등
장애인의 신체에 부여된 아름다움, 즉 일종의 ‘숭고미’에 대한 관심은 ‘타자’의 숭고함에 대한 관조와 사색의 과정이다. 관조가 가능하려면, 그 대상이 내 삶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절대 허락해서는 안 된다. (...) 타자를 미적으로 숭배하는 태도는 자기기만을 불러온다.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내 삶으로 들어올 때면, 그것을 거부하고자 하는 충동이 우리를 괴롭힌다. (261~262)
타인의 신체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든, 거기서 느끼는 감동이나 숭고함이든 중요한 것은 신체에서 출발한 그 관심이 어디로 향하는가가 아닐까? (263)
실재reality는 신체에 부여된 각종 관념들보다 신체 자체에 더 가깝다.(265)
사람들은 자주 ‘장애는 현실’이라고 말한다. 엄밀히 말하면, 장애가 현실이 아니라 장애가 있는 사람의 몸이 현실이다. 장애를 둘러싼 현실이라는 ‘관념’은 너무나 많은 입장, 태도, 관행, 오래된 습속, 누적된 혐오, 부족한 상호작용의 경험, 변화 가능한 사회 시스템에 대한 몰이해, 의료적으로 재단되고 분류된 병명들로 가득 차 있다. (266)
몸을 욕망해야 한다. 종교나 도덕, 정치가 뭐라고 하든 너의 ‘신체’와 함께하고 싶다는 선언이야말로 타인을 향한 욕망이고, 곧 사랑이다. (...) 몸에서 시작해 그 몸을 가진 개별자에 대한 사랑으로 에로스가 확장될 때 그것은 우리가 닿고자 하는 ‘사랑’의 이상에 가까워질 것이다. (267~268)
우리의 뇌는 사진기가 아니라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의 눈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 초상화는 사진과는 다른 양의 시간을 구현한다. (...) 초상화는 그 사람이 그동안 보여준 여러 특징과 모습을 겹겹이 농축시켜 한번에 화음처럼 ‘들려’준다. (272~273)
한 사람이 인생에서 써나가는 자기 서사는 우리가 그 사람을 바라보는 ‘신체’에 통합되고, 농축되고, 종합되어 구현된다. (277)
9장 괴물이 될 필요는 없다
앤드류 솔로몬이 지적했듯 부모는 우리 자신의 은유이다. 부모의 사랑과 관심, 인정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를 돌보고, 아끼고, 받아들인다. (310)
자신을 수용하고 돌보려 노력하지만 결코 완전하지 못할 이 ‘취약함’이야말로, 각자의 개별적 상황과 다른 정체성 집단에 속해 있는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공통분모일 것이다. (310)
예의 바른 무관심, 섬세한 도움의 손길, 무시와 냉대 속에 혼자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고개 숙여 말을 거는 순간, 조금 더 긴 시간을 들여 상대방의 ‘초상화’를 그려보려는 미적․정치적 실천. 그런 것들이 모여 자기 삶의 조건을 수용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하고 탁월한 자아를 구축하게 한다. 그러한 자아를 가진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자신들의 구체적인 삶을 언어화하고, 법적인 권리로 만들고, 품위와 겉모양만 중시하는 품격주의자들의 세계에 구멍을 낸다. 모든 사람에 대한 진심 어린 존중은 이제 법률이 되고, 헌법이 되어 우리 공동체의 최고 규범이 된다. 그런 규범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다시 자신의 친구에게 “피부 관리해야 돼”라는 귀엽고, 뭉클하고, 놀랍도록 탁월한 상호작용 기술을 발휘해 인간의 존엄성이 모든 이념의 중심에 오는 세상을 향한 긴 순환을 시작한다. (312~313) - 아름다운 존엄의 선순환!
(2019년 2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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