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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모으기/문장들:2020

이동진이 말하는 봉준호의 세계-(이동진/위즈덤하우스/2020)

by 맑은 물 2020. 10. 9.

1장 기생충

  봉준호의 영화는 장르를 차용해서 시작하고, 그 장르를 배신하면서 끝난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늘 장르의 뒤편에 있다. 규칙과 관습에 따라 진행되는 장르의 작동 원리는 이야기의 갈래마다 누적되어 온 '계획'이지만, 봉준호는 그 주먹만 한 계획이 바닥을 알 수 없는 '무계획'의 무저갱 속으로 소리도 없이 추락하는 광경을 기어이 보아낸다. (14)

  계급 상승에 대한 욕망이 가장 적극적이었고 또 그럴 만한 능력도 컸던 기정이 작품의 말미에서 살해당할 때, 사라지는 것은 계급 상승의 사다리 자체일 것이다. (더구나 그런 기정을 죽이는 것은 계급 상승의 욕망을 아예 상실한 근세다.) (24~25)

 그런 하층이 전달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 아니라 냄새다. 자동차 안에서 그 냄새는 차의 진행 방향과 반대인 역류로 표현되는데, 이것은 자신의 진의와 감정을 전달할 방법이 봉쇄된 채 전달하고 싶지 않은 존재 자체의 곤궁함만이 전해지는 하층 계급 소통의 딜레마를 단적으로 요약한다. (29)

[기생충] 대담 : 이동진×봉준호

이동진: 영화 속에서 천사도 없고 악마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사람들이 뒤얽혀서 끔찍한 비극으로 끝난단 말이에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특정한 사람이 나쁘다거나 특정한 사람의 성격이 유독 이상해서가 아니라, 어찌 보면 양쪽 가족 모두 별로 차이 나지 않는 개성과 성향들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결과적으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을 보면 결국 각 사람의 인성이 아니라 그가 속한 계급 때문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죠. 그렇게 본다면 이 영화야말로 계급에 고도로 집중하는 영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봉준호 : (...) 방금 말씀해주신 그 부분이 이 영화의 핵심적인 작의였어요. 명백한 악당이나 악마도 없고 정의의 사도나 천사도 없으며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일상적인 틀 속에서 살아가는데 왜 이런 파국에 도달하게 되냐는 거죠. 물론 우연의 고리들이 몇 개 겹치긴 했다고 하더라도 말이에요. 그렇다면 이 시스템이나 제도에는 기본적인 히스테리나 불안이 깔려 있다는 거죠. 그게 가장 안 좋은 형태로 중첩됐을 때 우리가 뉴스에서 대충 밥 먹으며 보고 지나갔던 묻지마 살인이든 분석하기 힘든 살인사건이든 곪은 자리가 터지듯이 사건이 터질 수 있다는 거죠. 어떻게 보면 그게 이 영화의 시나리오 의도, 연출 의도였던 것 같아요. 그것이 또 어쩔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우리 시대라는 거죠. (134)

[마더] [괴물] [살인의 추억] [플란다스의 개] 대담

 섬세한 질감과 위력적인 양감을 함께 갖춘 그의 필모그래피는 미학적 완성도와 대중적 흡인력이 점점 더 효과적인 합류지점에서 만나 유영하며 그 궤적을 그려왔다. 봉준호 감동이 발휘할 수 있는 영화적 파워의 극대치는 그대로 현재의 한국 영화가 구사할 수 있는 힘의 최대치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까지 얻어낸 거대한 성취에도 불구하고, 장담컨대, 그의 정점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292)

 봉준호: 모성이 과연 아름답냐, 혹은 아름답기만 한 것이냐에 대해 물음을 던지고 싶었어요. 우리가 아무리 모자관계를 신비화시키려고 해도 그것 역시 결국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일 뿐이고, 암흑과 고통을 주고받는 관계일 수도 있다는 거죠. (390)

 

(2020. 9.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