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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모으기/문장들:2020

명랑한 은둔자 (캐럴라인 냅, 김명남 / 바다출판사 / 2020)

by 맑은 물 2020. 10. 10.

 

 

● 명랑한 은둔자

  내 경우, 가장 중요한 과제는 고독과 고립의 경계선을 잘 유지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 둘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사회적 기술은 근육과도 같아서 위축될 수 있고, 내가 경험한 바로도 육체적 건강을 유지하는 것처럼 사람과의 접촉을 유지하려고 애쓸 필요가 있다. (...) 고독은 종종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배경으로 두고 즐길 때 가장 흡족하고 가장 유익하다. (48)

● 쌍둥이로 산다는 것

  사실은 이것도 우리가 추는 춤의 일부다. 거리를 유지하되 상대가 필요할 때 응답하지 않는 일은 없어야 하고 서로를 잇는 끈을 아예 놓아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가 동시에 위기를 겪은 적이 거의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은 이 노력이 가장 잘 드러난 측면이다. 누군가 우리 둘의 삶을 그래프로 그린다면, 둘의 성공과 실패를 표시한 두 선이 번갈아 오르내리는 걸 보게 될 것이다. (...) 이런 교대에는 기이한 리듬이 있다. 꼭 우리가 감정을 말 그대로 서로에게 건네는 듯, 우울과 혼돈의 바통을 줬다 받았다 하는 듯 느껴진다. 네가 강하도록 해, 나는 약할 테니까. 올해는 네가 날 돌보도록 해. 내년엔 내가 널 돌볼 테니까. (57~58)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아마 모든 자매들이 그럴 텐데, 춤은 변한다. 우리가 둘 다 성장하고, 각자 실수하고, 각자 독립된 개인으로 편하게 느끼는 법을 익히면서 우리의 레퍼토리는 넓어졌다. 우리는 이제 독자성의 스텝을 추가했고, 이따금 겪는 실망을 견디는 법을 배웠고, 서로의 차이를 받아들이는 법을 연습했다. (59~60)

 

  그래도 여전히 나는 리베카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서로 각자의 삶에서 중요한 일을 이야기할 때마다, 혹은 그냥 서로 웃게 만들 때마다 우리가 기본적으로는 같은 화음에 맞춰서 움직인다는 걸 깨닫는다. 오래되고 익숙하고 푸근한 그 화음은 우리가 공유한 과거의 화음, 우리의 친밀한 왈츠가 그리는 음악이다. (60)

 

● (한없이 한없이 한없이) 사랑받고 싶을 때

  여자들은 카멜레온처럼 변신하는 데 능하다. 우리는 파트너가 바라는 모습으로 자신을 바꾸는 데 익숙하고, 본능적으로 자신의 욕구와 욕망보다 상대의 욕구와 욕망을 더 중요시하고, 관계에서 발생한 어떤 실패에 대해서도 쉽게 자신을 탓한다. (76)

  우리가 그저 사랑받기만을-한없이 한없이 사랑받기만을-원한다는 건 사실 내적으로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 혼자서도 충분히 귀한 존재라고 느끼지 못한다는 것, 그 느낌을 바깥의 다른 사람으로부터-아마 지나치게 많은 양을-얻어야 하는 상태라는 것을 뜻할 때가 많다. (80)

  사랑받는 느낌이란-진정으로 사랑받는 느낌이란-일종의 균형이 필요한 일이다. 그 느낌은 상대와 내게서 절반씩 생겨나야 한다. 사랑은 솟구쳤다가 가라앉았다가 하는 역동적인 감정이다. 가끔씩 밀려드는 의문과 실망과 애매함의 파도는 사랑의 자연스러운 물결에 반드시 있기 마련인 그 일부다. (81)

 

● 이 우정은 잘 되어가고 있어

  우리 여자들은 쉽게 가까워지는 재주를 갖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내게 이 우정이 놀랍도록 멋지게 느껴지는 걸까? 세간의 통념과는 달리, 가깝고 믿음직한 친구 관계를 유지하는 일은 여자들에게도 어려운 일일 수 있다. 적어도 내 경험으로는 그렇다. 어쩌면 우정의 정의상 그런지도 모른다. 결혼이나 가족처럼 제도화된 관계는 사회의 지지를 받지만, 우정에는 규칙이랄 게 없고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기준도 없다. (...) 우정은 때로 아주 실질적이고 긴요한 것이지만, 여러 관계들 중에서 가장 일시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어느 정도의 마모는 자연스럽고 예측 가능한 일이다. 사람들은 변하고, 각자 자기 갈 길을 간다. (96)

  경쟁심과 원초적 사랑이 뒤섞인 상태, 내게는 이것이 결정적인 열쇠로 보인다. (...) 나도 내 불편한 심정의 일부는 사회적으로 장려된 것임을 안다. 우리 문화는 여자들에게는 경쟁을 덜 가르친다. 아주 어려서부터-학교 놀이터에서, 운동장에서, 교실에서-경쟁하도록 훈련받는 남자아이들과는 달리 우리는 협조하고 순응하도록, 공격성이나 이기성 같은 '여성스럽지 못한' 감정들은 모두의 평화를 위해서 억누르도록 훈련받았다. 하지만 여성에게도 마음속에는 시기와 투지가 남아 있다. 그런 감정도 분명 친밀성의 힘에 대한 믿음만큼 영속적이다. 그러니 우리의 우정이 사활이 걸린 문제처럼 될 수 있는 것, 유대감은 공기처럼 느껴지고 갈등은 불과 기름처럼 느껴질 수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여자친구와의 관계에서 끝까지 버티기 어려운 것, 이런 어둡고 혼란한 감정들을 견뎌내기가 어려운 것, 왜 이토록 부담되게 느껴질까 이해하기조차 어려운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렇다면 현실은 무엇일까? 당연히 그것은 실제로 부담이 큰 일이고-이것은 자신의 마음을 타인에게 열어 보이는 데 따르는 대가다-진정한 친밀감에는 당연히 고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애인과의 관계에서 성공하려면 에너지와 헌신과 정직함을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늘 알았지만, 우정에도 같은 원칙이 적용된다는 사실을 아는 데는 황당하게도 오랜 시간이 들었다. (102)

 

● 술 없이 살기

  너무 사소한 발견들이 아닌가 싶겠지만(실제로 사소하다), 그래도 이런 교훈들은 주야장천 술만 마실 때는 배울 수 없고 우리가 견고한 자아 감각을 구축하려면 꼭 필요한 작은 벽돌들이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 내 욕구는 이것이야, 내 특별한 강점과 약점은 이것이야, 하는. (198)

  술은 사람의 성장을 지체시킨다. 사람을 성숙함 및 자신감의 척도에서 한 단계 나아가게 하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하는 삶의 두려운 경험들을 겪지 않도록 만든다. (198)

 

● 마취제 없는 삶

    마약 중독자나 알코올 중독자를 위한 재활 프로그램에 들어가면, 종종 '좋은 소식-나쁜 소식' 선언을 듣게 된다. (...) 만약 당신이 중독을 포기한다면, 좋은 소식은 하나의 전쟁이 끝났다는 것이다. (...) 그런데 나쁜 소식은, 또 다른 전쟁이 막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당신은 이제 새로운 영역에서 예전에 쓰던 무기도 없이 싸워야 한다. 마취제도 없이 매일매일 부상을 겪어내야 한다. (214)

  이번에는 내면에서 벌어진다는 차이가 있지만, 그래도 애초에 당신을 중독으로 내몰았던 적들과 맞서 싸워야 한다는 점은 차이가 없다. 그 적들이란 당신의 두려움과 분노와 불안정함, 위로와 위안을 갈구하는 마음, 곧 당신 자신이다. (214)

  이 전쟁의 초기 단계는 마치 팔다리를 잃거나 절친한 친구를 잃은 것처럼 더 충격적일 수 있다. (...) 내가 딴 사람 몸속에 사는 것 같은 기묘한 감각이 들었고, 더없이 익숙한 행동들마저 낯설고 이상하게 느껴졌다. (...) 그런 순간이면 예전에 내가 술로 익사시키려고 했던 감정들이-불안, 슬픔, 자의식-수면으로 떠올랐고, 그러면 나는 예전에 불안을 달랠 때 쓰던 믿음직한 무기 없이, 말 그대로 무장해제된 채 그것들을 고스란히 느끼면서 앉아 있곤 했다. (216~217)

 

  중독은 누가 뭐래도 자기 보호 효과가 뛰어난 방법이다. 중독은 대처 기제이고, 강렬한 감정들에 대한 해독제다. 그러니 우리가 중독을 내려놓은 뒤에는 그동안 중독으로 마비시키고 변화시키려고 애썼던 감정들이 모조리 표면으로 부상하기 마련이다. 가끔은 급류처럼 덮쳐서 버거울 지경으로. 이것은 자명하고 불가피한 이치다. (219)

  하지만 낫는 것은 아픈 일이다. 중독에 취약한 사람들은 회복의 도구를 집어 들기를 체질적으로 어려워한다. 그런 도구는 보통 중독적 생활 방식과 정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독적 생활 방식은 무릇 모든 감정적 혹은 정신적 문제에는 물리적 해결책이 있다는 믿음에서 기인할 때가 많다. (...) 내가 요즘도 종종 놀라는 점은 거식증과 알코올 중독에 비슷한 점이 많다는 것이다. 둘 다 내가 내 감정으로부터 시선을 돌리도록 해주는 수단이었고, 각각 감정을 굶겨 죽이거나 술로 씻어내버리는 방법이었다. 한편 술을 끊은 요즘 내가 쓰는 수단은 예의 그 충동들을 더 건전하게 다룰 방법을 찾아내는 것, 고통으로부터 달아나는 대신 그것을 대면함으로써 나아질 수 있는 전략을 찾아내는 것이다. (220~221)

 

● 권력과 섹슈얼리티의 오용

  우리 문화는 육체적인 측면이 아닌 측면에서도 자신에게 만족하는 여자아이, 자신을 한 온전한 인간으로서 본질적으로 귀한 존재라고 느끼는 여자아이를 길러내는 데 능하지 못하다. (...) 나는 어떻게 하면 예뻐 보이는지는 잘 알았지만(그것은 중요한 문제로 보였다), 어떻게 하면 힘을 갖게 되는지는 알지 못했다.(그것은 추상적인 얘기로 들렸다.) 그래서 남자들이 내게 보이는 지적 존중과 성적 관심을 하나로 엉킨 것으로 받아들였다. (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