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모성은 우리의 개인적·정치적 결함, 다시 말해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잘못된 일에 대한 궁극적 책임을 떠맡은 희생양이며, 그 결함과 잘못을 바로잡는 것이 어머니에게 부여된-당연히 실현 불가능한-임무였다. (6)
우리가 어머니를 공인된 잔혹함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세계의 불의에 눈을 감고 마음의 문을 닫고 있다는 것, 그것이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 주장이다. (7)
1. 사회적 처벌
* 지금은
어머니라는 주제는 온통 이상화로 가득한, 이 점은 페미니스트 비평의 가장 중요한 공격 대상 중 하나였다(이상 理想이란 타인뿐 아니라 자신을 가장 확실하게 응징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다). (...) 세상의 현실이 어머니들이 이상에 부합하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드는데도 이상화 경향은 누그러들지 않는다는 점, 이것이 모성 담론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다. 오히려 그럴수록 이상화 경향은 강화되는 듯하다. (...) 전 지구적으로 경제적 어려움과 불평등이 심화하면서 빈곤 상태에 처한 아이들이 늘고 있으며, 냉혹한 사회적 낙오과정으로부터 자신의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점점 더 많은 가족이 승산 없는 싸움을 벌이고 있다. 그 결과 사회 불안은 점점 고조될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다른 여러 위기의 순간에도 그랬듯이 어머니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은 특히 파괴적인 형태의 사회 비판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다는 점에서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확실한 전술이다. 어머니는 언제나 실패했다. 내 주장의 핵심은 그러한 실패가 재앙이 아니라 정상적인 것이며 실패 역시 어머니에게 맡겨진 임무의 일부라는 점이다. (40~41)
물론 장려되는 것은 백인 중심의 중산층 가정이라는 이상이지만 그에 부응할 수 있는 가족은 점점 줄고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이상은 전 계급과 종족 집단으로 확산되며 그 결과 유색인 여성의 '어머니 노동'이 유린당한다. (...) '어머니 노동'은 인종차별적 세계에서 집단 공동체의 생존에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며, 그로써 어머니라는 주제에 대한 백인 중심적인 모든 이분법에 동요를 일으킨다. 오늘날 특히 미국에서 백인 어머니와 유색인 어머니는 해묵은 관계를 반복하고 있다. 불법 이민자가 중산층 가정에서 아이를 돌보고, 그 덕분에 백인 어머니는 아이 양육이라는 짐을 벗어버린 채 직장생활과 가정생활이 완벽하게 양립할 수 있음을 과시할 수 있게 되었다. (47)
이민자 여성은 대부분 자녀를 두고 떠나올 수밖에 없으며 매우 낮은 임금을 받는다. 또다른 형태의 착취인 이 이야기 배후에도 모성의 상실이 자리한다. (...) 서구 문화에서 어머니들 간에 계급과 종족의 경계를 넘어선 연대를 이루려는 움직임을 찾아보기란 매우 어렵다. (48)
어머니는 성적 존재임을 드러내서는 안되는 여성이다. 어머니는 자신의 욕망으로부터 세상을 지켜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세상으로 하여금 인간의 섹슈얼리티에 내재된 통제 불가능성을 감추고 자신의 탐욕을 외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마치 섹슈얼리티는 오직 결혼생활이라는 테두리 안에만 존재한다는 듯 말이다). (52)
'순진한' 소녀는 곤경에 빠져도 이해받을 자격이 있는데, 단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자신이 저지를 죄를 과시하듯 떠벌려서는 안됐다." 아이가 없는 여성도 성적 오명에서 자유롭지 못하긴 마찬가지였다. ("확실히 어머니가 되기를 거부하는 여성은 성관계를 좀 지나치게 즐기는 것 아닐까요?") (52)
우리가 비난과 요구라는 두가지 모습으로 (요구는 비난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어머니에게 전가하는 그 두려움은 과연 무엇일까? (...) 강력한 모성의 이데올로기는 영원불변의 것인 양 보이므로-지상에서 모성으로-우리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과연 늘 그랬을까? 이것은 결국 페미니즘의 첫번째 강령이기도 하다. 정형화된 이미지, 특히 자연이나 미덕, 본질로 가장한 것에 도전하고자 한다면, 그리고 그 이미지를 단상에서 끌어내리거나 썩어가는 진흙탕 속에서 잡아채 일으켜 세우고 싶다면 그 모든 것이 어디서 시작되었는가를 찾아야 한다.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은 그 모든 것이-아마도-존재하지 않았던 시간과 장소를 찾는 것이다. (53)
*그때는
어머니의 몸에 대한 남성적 식민화는 자궁 내에서 시작된다. (75)
오늘날 법 문서 작성 시 임산부와 태아는 하나의 유기적 단위 또는 잠재적 갈등의 장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어떤 면에서 그리스의 관념을 연상시킨다. (77)
그리스 발생학에서 임신에 대한 이해는 태아의 손상과 유사한 관념의 영향을 받았다. 태아는 어머니 때문에 언제나 위험에 처할 수 있었으며, 미숙아나 병약한 아이의 출생 같은 문제가 발생하면 그것은 오로지 어머니의 책임이었다. (...) 여성이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문제(자궁의 크기)와 여성에게 결코 책임지울 수 없는 상황(기절, 두려움, 놀람, 구타)까지 뒤죽박죽으로 아우른다. (79)
또다른 발생학적 설명은 이보다 더 충격적인데, 어머니가 짊어지는 과도한 책임과 죄책감을 전혀 참작하지 않은 채 여성이 잉태 과정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고 보는 주장이다. 여성은 그저 남성의 씨를 받는 수동적 씨받이에 불과한, 보조적이면서 동시에 비난받아 마땅한 존재다. (80~81)
어머니 노릇은 문화가 섹슈얼리티를 정화하는 방법 중 하나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모성은 이 기제에 의해 작동한다. (87)
2. 심리적 맹목
*사랑하기
(로알드 달의 작품 마틸다 와 관련하여) 실패한 어머니-아이에게 과도하게 몰두하는 어머니, 아이를 방치하는 어머니, 죽어 사라진 어머니-는 도처에 있다. (...) 어쨌든 분명한 것은, 어머니의 시선 아래 놓인다는 것이 은총이자 저주라는 점이다. 이는 전혀 과장이 아니다. 어머니의 시선이 지나치면 아이가 괴물이 되고, 충분치 않으면 아이가 온전한 인간의 세상에 들어서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103~104)
아기에게는 어머니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는 어머니가 아기를, 프로이트식으로 표현하자면, "아기 전하 혹은 어머니 자신의 이상적인 이미지를 투영하는 거울과도 같은 자기애적 대상("우리 엄마는 내가 기적이래요")이 아닌 자기 자식으로 인정할 경우에만 가능하다. 어머니에게 맡겨진 과제는 아기를 아기 자체로 인정하는 것이다. 엄마와 아기 모두 그게 어떤 모습인지 미리 알 수 없다 해도 마찬가지다. 그런 불확실한 상황은 견디기 어려운 법이다. "아기 전하"가 그처럼 ㄱ계속 위세를 떨치는 이유는 아마도 그 때문이리라. (104)
어머니가 자신의 아이에게 완전한 사랑과 헌신을 쏟기를 기대할 때, 우리는 그들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 것일까? (...) 소위 '과도하게 몰두하는 어머니'나 '자아도취적 어머니'에게 자신의 아이는 온 세상을 비추는 거울인데(티 한 점 없이 완벽해야만 한다), 완벽함에 대한 이들의 욕구는 어머니에게 지워진 완벽함에 대한 기대와 무관하지 않다. 바꿔 말해서, 우리가 어머니에게 완벽함을 기대하는데 어머니라고 그 불가능한 요구를 자신의 아이에게 전가하지 말란 법이 있는가? 결국 누가 되었든 강제적 요구에 복종하는 어머니는 자신에게 요구되는 역할을 왜곡된 방식으로 수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완벽함에 대한 요구는 또다른 완벽함에 대한 요구를 낳고, 그 과정이 반복되는 사이 생명의 고갱이는 얼어붙고 만다(소비재 역시 완벽함을 거짓 약속으로 제공한다는 점은 분명 우연이 아니며, 그게 바로 구매 행위가 늘 실망스럽고 그래서 다음 구매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106)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어머니를 위한 어머니의 사랑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어머니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 어머니가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조용히 아기만을 응시하며 앉아 있는(엎드려도 안되고 희열을 느껴도 안된다) 모습이 최고의 어머니상으로 간주되는 순간, 어머니의 쾌락, 어머니의 근심, 어머니의 세계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왜소해진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이에 대한 사랑이 어머니를 어디까지 몰아갈 수 있는가를 포함해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이 불편한 이야기들을 무시한다면 결국 이것이-본질, 본성, 미덕의 이름으로-시간대와 대륙을 넘나들 수 있는 복잡한 길을 폐쇄해 지도에서 역사를 지워버리는 격이 되리라는 점이다. (122)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는 자기 아이가 붙잡혀서-자신도 간신히 빠져나온-노예의 삶을 사는 걸 지켜보는 대신 아이를 살해하기로 선택한 어머니의 이야기다. (...) 모리슨은 이것이 메데이아 서사의 반복이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쎄서는 메데이아처럼 어떤 사내 때문에 자기 아이를 죽이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자포자기적인 분노에 휩싸여 아들을 죽이는 것과, 딸이 팔려 가 노예가 되는 것-어머니는 아직도 이 기억 때문에 괴로워한다-보다 죽는 편이 낫다고 여기는, 일종의 궁극에 가까운 돌봄 행위는 전혀 다른 일이다. (...) 쎄서는 사랑하는 마음에서 딸을 죽인다. (122~123)
백인 독자를 상대로-그는 억압된 미국의 노예제 역사를 폭로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다고 말한다-비인간적인 세계의 어머니는 역사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만 어머니가 될 수 있기에 이런 상황에서 아이를 살해할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한다. (124)
낙태와 마찬가지로 유아 살해는 세상의 냉대에 대응해 가장 냉혹하게 자율성을 주장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어머니 노릇을 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들은 어머니 노릇에서 나온 결정, 즉 어머니가 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125~126)
백인 서구 문화에서 이야기되는 어머니의 사랑은 일종의 사치다. 생존 자체가 어려운 상황에서 모성은 아이의 응석을 받아주고 착하게 굴기보다 앞을 내다보며 교활해야 한다. (126)
서구에서 어머니는 어머니라는 이유로 처벌받은 동시에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 것을 요구받는다. 미움은 사랑에 정확하게 비례하고, 요구가 강할수록 기대는 기만적이며, 숭배는 질책의 눈가림일 확률이 높다. (130)
*증오하기
어머니란 모든 가능한 집합들의 집합, 즉 그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담고 있는 포괄적 집합이다. 물론 고전적으로 어머니는 무언가를 담는 그릇으로 간주되었으며, 자궁을 그저 수동적인 그릇으로 본 그리스적 관념이 그중 가장 지독한 사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머니가 무엇을 담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처음에는 몸 안에, 그다음엔 품에 아기를 안는다. 한 정신분석 모델에 따르면, 아기 스스로 자신의 넘치는 충동을 담아내고 통제할 수 없을 때 이를 담아내는 것 역시 어머니의 몫이다. 그런 이유로, 어머니가 만약 다루기 어려운 감정을 밀쳐내고 고통과 분노는 서둘러 외면한 채 체면과 기쁨만을 찾는다면 그 어머니는 쓸모를 잃게 된다. (164~165)
(에스텔라 웰던의 책 [어머니, 성모마리아, 창녀 : 모성의 이상화와 폄하]와 관련하여) 웰던의 요지는 우리가 모성의 "어두운 면"을 인정하기를 거부한다면, 이는 그런 여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고통 속에 유기하는 것이자 그들의 아이를 잠재적 위험에 빠뜨리는 일임을 지적하는 데 있었다. (...) 따라서 모성을 이상화하거나 폄하하는 대신, 사회정책을 만들고 심리적 이해를 북돋워 "인간적 곤경의 중심"에 설 수 있는 응분의 자격을 지님에도 불구하고 거부당해온 모성이 제대로 된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167~168)
시몬 드 보부아르는 20세기 중반 이후 서구 페미니스트의 어머니였고, 리치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이를 안 가진" 여성 중 하나였다. (...) 보부아르는 지난 세기 중반처럼 불평등한 세상에서 어머니가 되는 것은 여성 스스로 자신의 근본적인 자유를 양도하는 행위라고 보았는데, 이러한 관점은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적용된다. (172)
보부아르의 글은 모성을 무엇보다 실존 사상-현대 서구 세계의 핵심 철학이면서도 현대 서구 세계에 한심할 정도로 부족한-의 목표에 견주어 평가한다. 실존주의에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자기 삶의 길을 만들어가는 것인데, 이러한 실존에 대한 전망은 아마도 어머니의 일상적 삶의 경험이나 세계와 가장 동떨어진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보부아르가 충만한 삶에 대한 모욕으로 외면했던 모성은 예기치 않게 그의 철학의 핵심에 구멍을 남기며 복귀한다. 보부아르의 반감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에서 모성은 우리를 어머니 되는 일의 중심에 자리한 윤리적 난제로 인도한다. 즉, 모성은 여성의 자율성에 대한 도전인 동시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통제 불가능한 지점에 접근할 기회이기도 하다.
여성은 어머니가 되면서 자유를 잃는다. (...) 그는 자신의 몸 안에서 자라고 있는 존재를 자신이 창조했다고생각하지만, 사실 그의 아기는 자신을 잉태한 몸에 전혀 무관심하다. "실제로 그가 아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아기가 그의 내부에서 스스로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여성의 자궁이 수동적 그릇이라는 생각을 다르게 표현하는 것도 아니고, 아버지를 배아의 유일한 창출자라고 보는 그리스식 설명의 편에 서는 것도 아니다. 임신한 순간부터 여성은 유적 존재를 위해 자기를 포기하고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생물학적 순환의 일부가 된다. 이 현실이 그를 "집어삼킨다". (173~174)
실존주의에서는 자신의 활동을 통해 초월성을 성취한 자만이 유일하게 독자적으로 생존 가능한 실존이 된다. 삶의 우연성에 지배당하는 것은 완전한 전락이다. 그런데 (...) 아이를 양육하는 일에도 '활동'이라는 명예로운 지위가 부여될 수는(대부분의 어머니로서는 아마 처음 듣는 이야기일 것이다) 없었다. 그 일은 존재의 투기投企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투기'와 '활동'은 실존주의 어휘 목록 중에서 자기긍정을 표현하는 핵심 용어다). 보부아르는 "여성은 [주체로서] 자신의 초월성을 주장하거나 대상으로 소외당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모성에 대한 그의 견해는 일종의 항의다. "가정에 갇힌 여성은 자신을 위한 실존을 발견할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보부아르이 철학적 의도가 지닌 논리적 효과이기도 하다. 인간을 생산한다는 것은 자유를 잃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해 평생에 걸쳐 전적으로 책임을 지는 것이라는 의미다. (174~175)
보부아르가 이야기하는 모성의 경험이 전적으로 어두운 것만은 아니다. (...) 실제로 보부아르는 위니콧과 함께 모성의 양가성에 대해 공개적으로 발언한 최초의 이론가로 평가할 만하다. 다음은 임신에 대한 보부아르의 발언이다.
"임신은 여성 앞에 펼쳐진 자아와 자아 간의 드라마이며, 여성은 이를 통해 풍요와 손상을 둘 다 경험한다. 태아는 그 몸의 일부이자 그를 착취하는 기생적 존재다. 그는 그것을 소유하고 또 그것에 의해 소유된다. 태아에는 그의 모든 미래가 담겨 있으며, 그는 태아를 자신의 내부에 담고서 자신이 세상만큼 거대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바로 이 풍요로움이 그를 파괴하며, 그로써 그는 스스로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느끼게 된다."(177~178)
처음부터 보부아르는 선택과 자유에 기반을 둔 여성의 운명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인간을 갈등적 욕망 사이에서 무의식적으로 추동되고 분열하는 존재로 본 정신분석적 견해야 상충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 역시 어머니가 된다는 것이 여성에게 자신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으로 추락하는 경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든 어머니는 한때 누군가의 딸이었다. 그들이 처한 상황이 어떠하건, 모든 어머니는 아이로서 자신이 경험했던 것을 파편적으로나마 다시 겪게 된다.
"어린 소녀가 성장하면서 진짜 갈등이 시작된다. 우리는 어린 소녀가 어떻게 자신의 어머니에게 맞서 자율성을 주장하고 싶어하는가를 보았다. 어머니의 눈에 그것은 가증스러운 배은망덕이다. 어머니는 자신을 벗어나려는 그 의지에 맞선다.어머니는 자신의 분신이 타자가 되는 걸 용납할 수 없다. 여성과 관련해 남성이 맛보는 즐거움인 완벽한 우월감을, 여성은 오직 자신의 아이, 특히 딸과의 관계에서만 느낀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열렬하건 적대적이건, 아이의 독립은 그에게 희망의 붕괴를 의미한다."
어떻게 해야 어머니가 특권 남용이라는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것은 어머니가 완벽하게 행복하거나 아니면 성인聖人이거나, 둘 중 하나가 되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 보부아르에 따르면, 어머니는 십중팔구 온 힘을 다해 이에 저항할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아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가부장제 세계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최악의 운명을 되풀이하게 된다. 남자가 그러듯이-최대의 아이러니인데-여성을 자신의 남성적 자아실현의 도구로 이용한다. 어머니는 다른 누군가의 등에 업혀 자신의 존재를 창조할 수 있다(이것이 남성의 정체다)고 믿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게 된다. (...) 보부아르도 감정의 역사, 즉 어머니라는 이유로 여성에게 부과된 불가능한 명령이 초래한 부정적인 심리적 결과를 추적한다. 어머니는 모든 것 혹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며, 그 결과 아이에게는 생명이면서 동시에 죽음이 된다. (178~180)
어머니가 딸과 씨름하며 가부장적 세계 속 최악의 남성성을 흉내 낼 가능성이 있다면, 동시에 어머니는 자기 자유의 한계를 양도하는 것 역시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이라는 점도 알고 있다고 보부아르는 지적한다. (181)
보부아르는 말한다. "어머니가 혼자서 이룰 수 없었던 충만함, 따뜻함, 가치를 아이를 통해 성취하고자 하면, 그는 필시 실망할 수밖에 없다. 아이는 오직 다른 이의 행복을 사심 없이 바랄 수 있는 여성에게만 기쁨을 가져올 수 있다. 그 여성은 자신으로 회귀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경험을 넘어서길 추구한다." (...)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른 누군가-우연히 당신의 아이가 된 이-의 행복을 바라며, 그 행복을 당신 자신의 자아를 위해 이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타자가 거하는 방식이다. (182)
(쥘리아 크리스떼바는) 어머니가 되는 것, 아이를 낳는 것은 이방인을 환대하는 행위이며, 그 결과 어머니 노릇은 그야말로 "우리에게 가까운, 그리고 우리 자신의 낯섦과의 가장 강렬한 형태의 접촉"이 된다(우리는 모두 근본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이방인이라는 정신분석적 믿음에 어머니들이 덜 당혹감을 느끼는 게 바로 그 때문인 것 같다). (183)
옮긴이의 말
에이드리엔 리치의 [더 이상 어머니는 없다]는 모성 연구의 방향성을 제공한 일종의 시원적 텍스트로 평가받는다. 리치의 의의는 (...) '제도'로서의 모성과 '경험'으로서의 모성을 구분해 어머니의 체험된 경험을 모성 연구의 주요 영역으로 전면화시켰다는 점에 있다. 리치에 따르면, 경험으로서의 모성이 "어떤 여성이건 자신의 재생산 능력과 아이들과 관련해 맺고 있는 잠재적 관계"를 의미한다면 "제도는 그 잠재성-그리고 모든 여성을-남성의 통제하에 두는 것을 목표로 한다". 리치는 이 구분을 통해 가부장제하에서 어머니의 경험이 가부장제적 모성 제도와 억압적 이데올로기에 지배당하고 이에 순응하는 것일 수밖에 없으면서도 그에 완전히 포섭되지 않고 저항하는 잠재성의 영역임을 환기하는데, 어머니가 체험한 경험의 이 억압적인 동시에 역량 강화적인 측면, 그리고 양자 간의 복합적 관계는 현재 모성 연구의 핵심적 주제다. 따라서 리치 이후 모성 연구는 경험과 제도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한편에서는 제도화된 모성의 신화를 해체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모성의 경험을 페미니즘적으로 전유하는 이중의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276~277)
(계속 반복하여 읽어야할 텍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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