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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풀어놓기/북한강변 학교 이야기

자유롭고 당당한 어린이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by 맑은 물 2022. 3. 13.
해마다 새 학기가 시작되는 전 날인 3월 1일이면 가슴이 설렙니다. 대한독립만세 운동의 기운이 바닥에서 치고 올라와서... 가 아닙니다. 내일 새로운 어린이들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들과 어떻게 첫 시작을 열어야할까 여러 가지 생각들이 폭풍처럼 몰아칩니다.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한다는 말에서 핵심은 '꿴다'라는 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추와 단춧구멍이 정확하게 꿰어져야 옷 모양새가 말끔히 완성이 되듯, 어린이와 교사의 마음이 서로 연결되어야 한 해의 시작이 매끄럽습니다.

어떻게 어린이들과 만날까 고민하면서 3월의 수업을 준비했습니다. 서로 소개하고 친해지기, 학년 하루 일과 알아보기, 공부의 목적과 방법 알아보기, 우리반의 이름과 약속 정하기 등 해야할 공부들이 많았습니다. 줄줄 이야기만 늘어놓으면 지루해질 수 있기 때문에 어린이들의 흥미를 돋울 그림책, 이야기책도 준비해 놓았습니다. 그렇게 완벽하게 준비를 하고 드디어 3월 2일 교실문에 들어섰는데.

맙소사... 교실이 너무 조용한 겁니다. 어린이들이 열 명 가까이 그림처럼 앉아서 가만히 있는 겁니다. 너무 조용해서 숨도 안 쉬는 줄 알았습니다. 서로 수다를 좀 떨고 있거나 제가 교실에 들어오면 한 두 명쯤은 제게 와서 말이라도 걸어주면 좋으련만. 너무 조용해서 책상 앞에 멀뚱하니 앉아 있으려니 민망하여 슬그머니 교실을 나왔습니다. 모든 친구들이 다 모이면 한 번에 같이 이야기 해야지 하고 말입니다.

잠시 후에 교실에 갔더니 다행히 조금 소란스러웠습니다. 몇몇 어린이들이 장난 치고 떠들어댑니다. 이래야 제가 좀 편하게 말할 수 있지요.
"안녕하세요!"
크게 인사했습니다. 그제야 어린이들이 조금은 어색하면서도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넵니다. 용감한 몇 어린이들은 목소리도 크게 내 주었습니다.

우리 5학년 1반이 첫인상은 일단 신중하고 차분했습니다. 종이 쪽지를 나눠주며 쪽지에 이름과 지금 이 순간의 생각과 느낌을 써보라고 했습니다. 돌아가면서 발표하기 전에 듣기, 말하기의 자세를 배웠습니다. 들을 때는 말하는 사람을 보면서 귀기울여서 반응하면서 들어주라고 했습니다. 말할 때는 듣는 사람을 보면서 정확한 발음으로 적당한 속도와 크기로 말하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이 진지하게 듣더니 방금 전 안내한 대로 열심히 듣고 열심히 말했습니다. 다만 말할 때 목소리가 작았고 긴장된 표정이 확연했습니다. 4학년 때 같은 반 친구도 있을 테고 학교나 동네에서 서로 마주친 친구들도 많을 텐데 마치 생전 처음 만난 사람들처럼 조심스럽게 말합니다. 잠시 고민했답니다. '이상하네, 내가 너무 무섭나? 긴장감을 조성했나?'

다음으로 자기 이름표를 만들었습니다. 도화지를 삼각뿔 모양이 되게 점어서 이름을 쓰고 꾸민 후에 풀로 붙이는 활동입니다. 교실에 있는 색칠도구를 두 명이 같이 나눠쓰게 책상을 붙이라고 했더니 몇몇 어린이들이 옆에 앉은 친구가 남자(또는 여자)라며 책상을 떨어뜨려놓습니다. 저는 속으로 또 생각합니다. '음.. 남녀 구분을 두려고 하는구만.'

그 날 밤, 우리반 어린들과의 첫 만남을 돌이켜보며 다음 날 수업할 내용을 고쳤습니다. 신중하고 차분하고 진지한 모습은 분명 긍정적이지만 좀더 자유롭고 당당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한 반 안에서 굳이 남녀를 구분해서 무의식적으로 편 가르기하는 모습에 대해서는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준비한 수업이 바로 고정관념에서 탈출하는 수업이었지요.
[안녕? 나의 핑크 블루] 책을 읽고 같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우리 모두는 태어나기 전부터 여자는 핑크, 남자는 블루로 정해진 색을 따라 살고 있다는 것을 먼저 확인했습니다. 사진으로 직접 보니 참 놀라웠습니다. 다행인 건 어린이가 점점 자라나 청소년이 되고 성인이 되어감에 따라 점차 다양한 자신의 색을 찾아간다는 것이지요. 어느 사이엔가 핑크와 블루는 여자와 남자의 색이 아니라 다양한 색 중의 하나로 변화했습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색깔이 존재한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색깔이 다양하듯이 사람들도 남자와 여자가 아니라 저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것도 깨닫게 됐고요.
수업이 끝나자마자 우리반 어린이들이 남자 여자 서로 섞여 놀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성별 고정관념이 없다고요!' 이렇게 온몸으로 외치는 것 같았습니다. 젠가 놀이도 다같이 모여 하니 얼마나 재미있던지요. 근데 꼭 남녀가 같이 모여 놀아야 하는 건 아닙니다. 여자어린이들끼리 남자어린이들끼리 모여 놀기도 합니다. 하고 싶은 놀이가 같은 친구들끼리 모여 노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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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에는 샤를 페로 원작의 [신데렐라] 영상을 보며 이야기 속의 고정관념을 찾아보았습니다. 그 후에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새로 쓴 [해방자 신데렐라] 이야기를 읽어보았습니다. [해방자 신데렐라]에서 신데렐라는 더 이상 왕자의 선택을 기다리며 재투성이로 눈물 짓는 착하기만 한 사람이 아니었고, 왕자는 백마를 타고 신데렐라를 데려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생각으로 이야기를 쓰니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어린이들의 눈이 휘둥그레 집니다. [해방자 신데렐라]에서 신데렐라는 집을 나와서 케이크 가게를 차리며 사람들을 대접하고, 다른 사람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길을 찾아가도록 이야기를 들어주고 돕습니다. 왕자는 친구 하나 없는 궁궐에서 벗어나서 농장에 찾아가 농사를 짓는 농부 왕자가 됩니다. 신데렐라와 왕자는 결혼하지 않고 친구가 되지요.
이 수업을 하고 난 이후로 우리 5학년 1반 어린이들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려 노력한답니다. 목소리도 더 커지고 생각도 구체적으로 변했습니다. 더 활발하게 친구들과 어울려 놓고 수업 시간에도 눈을 빛내며 귀기울입니다. 어린이들의 자유롭고 당당한 모습이 정말 보기 좋습니다.

참, 우리 5학년 1반의 이름은 공놀이반입니다. 공부할 때 공부하고 놀 때 노는 반이랍니다. 저는 '공부도 놀이처럼 재미있게, 놀이할 때도 자연스럽게 공부하는 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레바람 부는 주말이지만 마음만은 쾌청하니 맑은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