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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풀어놓기/북한강변 학교 이야기

무엇이 시가 되나? : 시 수업 이야기

by 맑은 물 2019. 1. 30.

"우리 정원에 대한 가장 선명한 기억은 그곳에서 맡은 향기나 본 모습이 아니라 거기서 들은 소리였다. 환청이라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미국 중서부 지역에서는 정말로 식물이 자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절정기에는 옥수수가 날마다 하루에 1인치씩 자라고, 그 빠른 성장에 맞추기 위해 여러 겹의 껍질이 조금씩 움직인다. 바람이 불지 않는 조용한 8월에 옥수수밭 한가운데 서 있으면 그렇게 움직이는 껍질들이 계속해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다." (『랩 걸 –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 호프 자런, 김희정 옮김 / 알마 / 2017)

    과학자가 쓴 자기 이야기인 [랩 걸]에서 위의 문장을 만났을 때 숨이 멎는 줄 알았답니다. 미국 중서부의 드넓은 옥수수밭 한가운데서 식물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고요히 서있는 사람이 보였고 그 사람을 통해 저도 '옥수수가 자라는 소리'를 듣는 듯했답니다. 과학자의 삶은 끝없는 관찰과 실험의 연속이지요. 그 삶 속에서 만난 강렬한 감각(옥수수 자라는 소리!)을 표현한 저 문장들은 그 자체로 시였습니다. 과학자가 쓴 시!

    이오덕 선생님은 시란 '삶에서 우러난 감동을 토해내듯이 자기 말로 풀어낸 것'이라 하셨어요. 감동이란 말 그대로 감정의 움직임을 말하지요. 아이들에게 저는 이것을 '강한 감정'이라 표현했답니다. '나 감동 먹었어.' '핵감동' 이런 식으로 감동이라는 말이 원뜻과 상관없이 낭비되고 왜곡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호하고 멋진 말로 사람을 홀리고 장식하는 글로 소비되거나, 상징적이고 어려운 말로 사람들을 질리게 하는 글로 왜곡되어 외면받거나.

    저는 시인들은 가장 민감하고 독창적인 사람들이라 생각합니다. 너무 민감해서 남들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듣고,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사람들. 옆에 있는 사람이 아픈 기미가 보이면 먼저 아픈 사람들. 그 감각과 감정이 '다 사는 게 그런 거지' 식으로 치부되는 게 아까워서 '가장 정확한 말'로 나타내기 위해 언어를 고르고 다듬는 사람들이라고요. 그래서인지 저는 시집을 읽으면서 시가 아니라 '시인'을 읽게 됩니다. 시인이 사람을 대하는 자세, 살아가는 태도 같은.

    이런 면에서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시인되기가 더 쉽습니다.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감각적으로 민감하고 유연하고 자유롭습니다. 어른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을 듣습니다. 어른들이라면 시도도 안 할 일은 아이들은 눈 깜짝도 하지 않고 저지르기도 하지요.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아하! 정말 그렇네.' 하며 감탄할 때도 많아요.

    교실에서 시 공부를 먼저 했습니다. 시란 무엇인지 아이들이 이해하기 좋게 정의해 보고, 좋은 시 '감별법'을 공부했습니다. 어떤 시가 좋은 시인지 모르면 아이들은 그저 짧게, 같은 말을 반복해서 적어놓고는 시라 합니다. 시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다는 건 재앙입니다. (교사는 시를 가르칠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시인이 되어 산책을 나갔습니다. 산책을 나가기 전에 조건을 붙였습니다. 온몸의 감각을 다 활용할 것, 혼자서만 온전히 감각에 집중할 것. 그래야 시로 쓰고 싶은 '강한 감정'이 온다고요.

    아이들이 학교 여기저기에 흩어져서 온몸의 감각을 다 써서 시를 쓸 때 저는 사진을 찍었습니다. 행여나 아이들의 시적인 감흥을 깰까 봐 조심조심. 나중에 아이들이 교실에 들어와서 쓴 시와 사진을 함께 두고 보니, 시 쓰는 아이들의 모습이 시와 통해서 신기했어요. 아이들이 이 순간의 햇살과 바람을 자신의 작품과 함께 오래도록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2018년 4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