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농사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겨울방학 워크숍 때 학년별로 아이들의 마음을 끌 수 있는 특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로 했다. 연극놀이, 온작품 읽기, 글쓰기는 수업 속에서 꾸준히 이루어지는 활동이라 프로젝트라는 이름은 어울리지 않았다. 게다가 프로젝트를 힘 있게 진행하려면 프로젝트의 기획이 아이들로부터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학년 프로젝트는 교사가 미리 정할 것이 아니라 3월에 아이들을 만나서 함께 정하기로 했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이 흥미로워 할 제안들을 몇 가지 준비해 두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농사를 지어보는 게 어떨까 불쑥 말을 꺼내보았다. 나는 음식 만드는 걸 좋아하고 나눠먹는 걸 좋아하고 유기농 농작물을 좋아한다. 찔끔 곁다리로 텃밭 농사를 시작했다가 돌보지 않아 잡초로 뒤덮인 텃밭에서 수풀을 헤치며 감자를 캐던 일이 생각난다. 이왕 농사를 지으려면 제대로 지어봐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제대로 할 것이 아니면 아예 시작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수업 시간에 텃밭을 가꿔야 하고 아침저녁으로 들여다봐야 한다. 수확의 기쁨만 얌체같이 누리려 할 것이 아니라 일하면서도 느끼는 힘겨움과 피로도 온몸으로 느껴야 한다. 수확한 농작물을 모두가 함께 나눠먹으며 일의 보람과 나눔의 즐거움을 느껴봐야 한다. 먹고도 남는 농작물은 직접 팔아보고 수익금을 의미 있게 써야 한다. 수확한 농작물과 된장이나 청국장, 효소 등을 만들며 전통음식에 대해 배울 수도 있다. 농사의 기초도 모르는 내가 이 프로젝트를 감당해낼 수 있을까 잠시 생각해봤다. 힘닿는 데까지 해보면 배우는 게 많을 것 같았다. 어차피 모든 일은 잘 하든 못하든 내 힘닿는 데까지 밖에 못한다고 생각하면 세상에 못할 일도 없다.
3월에 아이들에게 4학년 때 해보고 싶은 활동을 써보라고 했다. 작년 겨울에 만들어 먹었던 붕어빵이 맛있었던지 붕어빵 만들기를 비롯해서 음식 만들어 먹자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다. 나의 농사 프로젝트 제안을 들이밀 적기였다. “얘들아, 우리 음식 만들어 먹을 때 말이야, 이왕이면 우리가 직접 농사지은 유기농 재료로 만들어 먹으면 어떻겠니? 농사지은 게 많으면 요리해서 팔기도 하고, 번 돈으로 홀로 사시는 외로운 어르신들도 찾아뵙고.” 순간 아이들의 눈이 활짝 커지더니 좋다며 웅성대기 시작한다. 신나는 분위기에 기름을 붓는다. “너네 작년에 붕어빵 만들었다며. 그 때 재료들 다 밖에서 사온 거 아냐. 우리가 농사를 지으면 우리가 농사지은 밀로 밀가루 내고, 팥 농사 지은 걸로 단팥 만들고, 학교 닭들이 낳은 달걀도 넣어서 반죽하고...” “선생님, 붕어빵만 만들지 말고 계란빵도 만들어요!” “와! 맞아! 완전 좋다.” “좋아요!” 여기저기서 신나는 비명이 터져 나온다. 이쯤 되면 빠지는 시늉도 필요하다. “그런데, 선생님이 걱정되는 게 있어. 농사지으려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일하느라 힘들기도 할 텐데 괜찮을까? 너네 농사도 안 지어봤잖아, 선생님은 너희들보다 더 몰라. 너희가 공부해가면서 다 해야 돼.” “괜찮아요, 하면 되죠.” “그래, 정말?” “네!” 이렇게 만장일치로 농사 프로젝트를 하기로 결정했다.
주말에 트랙터로 밭을 갈고 로터리를 치기로 했다. 그 전에 텃밭에 있는 쓰레기들을 치워야 했다. 중간놀이 시간에 아이들과 함께 우리가 농사지을 텃밭을 보러 갔다. 먹다 버린 굴 껍데기들, 플라스틱과 유리병들, 비닐 쓰레기에 비료 포대까지 버려져 있는 텃밭을 눈으로 직접 봐야 청소가 필요하다는 걸 아이들이 절실히 느낄 것이다. 넓은 텃밭을 보며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열정 넘치는 남자친구들 여러 명이 행정실에 가서 장갑을 빌려와서 중간놀이 시간에 쓰레기를 치운다며 달려갔다. 땅에 묻힌 비닐 쓰레기를 뽑아내다 누군가 발견한 돼지감자 덕분에 쓰레기 치우기는 순식간에 돼지감자 캐기로 돌변하긴 했지만 그 덕분에 아이들은 텃밭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다음 날에는 체육시간을 반납해서 텃밭을 청소하러 나갔다. 순식간에 준비했던 두 포대가 가득차서 급히 종이상자까지 준비해 와서 쓰레기를 담았다. 청소 후에는 돼지감자를 캤다. 아이들은 호미를 들고 돼지감자가 가득한 ‘명당’ 자리를 찾아가며 신나게 캤다. 아이들의 봉지에 돼지감자들이 담겨지고 신나게 땅을 파다보니 시간이 순식간에 다 흘러버렸다. 나도 아이들과 함께 돼지감자를 캤다. 붉은 생강같이 생긴 돼지감자를 흙 속에서 발견할 때마다 신이 났다. 수업을 다 끝낸 후에 몇몇 아이들과 또 돼지감자를 캐러 갔다. 농사꾼이신 숙직 기사님이 가세해서 진정한 돼지감자 ‘명당’ 자리를 안내해주셨다. 작은 것들은 골라서 버릴 정도로 굵직한 돼지감자들이 튀어 나왔다. 비닐봉지가 터져나갈 듯이 돼지감자를 캐냈다. 나중에는 바구니를 가져와서 돼지감자를 담아가서 수돗물에 씻어서 담았다. 깨끗이 씻은 돼지감자를 먹어보니 아삭하면서도 고소하고 살짝 달콤한 맛이 환상적이다. 돼지감자를 풍성히 수확한 아이들과 행복한 인사를 나누며 헤어졌다. 베란다에 수북이 쌓인 돼지감자로 맛난 장아찌를 담가야겠다. 즐거운 일거리들이 기다리고 있다.
(2018년 3월 31일 토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