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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풀어놓기/예전에...

농사 본격 시작

by 맑은 물 2019. 1. 31.

 

상추 뜯어먹고 고추나 따먹다가, 장마철에 잡초 올라오고 땡볕에 땅바닥에 마르면 텃밭 쪽은 쳐다도 안 보던 나였다. 혼자 텃밭을 할 때는 그렇게 해도 됐다. 아이들과 함께 1년 동안 수업시간에 농사를 짓기로 한 지금은 안 된다. 부담이 되고 긴장이 됐다.

텃밭에 거름을 뿌리고 이랑을 세우기로 한 전 날에 농기구와 유기농 비료를 사러 농협으로 갔다. 필요한 농기구의 이름도 쓰임새도 수량도 파악하기 어려워 교장샘의 도움으로 겨우 목록을 정했다. 복합비료가 화학비료라는 것도 몰라서 복합비료 사겠다가 했다가 그러면 유기농 농사가 아닌데?” 말에 화들짝 놀라기도 했다. 유기농 농산물 사서 먹을 줄만 알았지 농산물이 마트에 오는 과정에 대해서는 놀랄 만큼 무지했다.

농협에 가서 교사라는 걸 밝히고 4학년 아이들과 일 년간 텃밭 농사를 짓기로 했다고 말씀드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영농상담사라는 직책을 가진 아저씨가 오랜 시간 친절하게 농기구의 이름과 쓰임새를 설명해주셨다. 넓적한 포크같이 생긴 농기구는 레이크인데 이랑을 세울 때 흙을 올리고 돌을 고르는데 사용하고, 삽은 고랑의 흙을 파서 이랑에 올릴 때 사용한다. 선호미는 고랑 사이에 난 풀을 제거할 때 호미처럼 사용하는 데 서서 작업할 수 있기 때문에 호미라 부른다 한다. 구입 목록에 있었던 쇠스랑을 직접 보여주며 이미 로터리가 쳐져 있으면 뭉친 흙을 깨는 용도로 쓰이는 쇠스랑은 구입할 필요가 없다 한다. 검정 비닐은 1m 20cm 정도의 너비가 적당하다 하신다. 너무 넓지 않나 했더니 이랑의 너비가 60~80cm, 높이가 20cm인 걸 감안하면 비닐 양쪽 끝을 흙에 묻어 팔랑대지 않게 묻으려면 최소한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하신다. 텃밭에 뿌릴 유기질 비료는 돼지똥, 소똥, 닭똥을 톱밥과 섞여 발효시킨 건데 흙 위에 뿌리고 가스가 빠질 때까지 1주일 정도는 기다린 후에 비닐을 덮어야 한단다. 어떤 작물을 심을 거냐고 물어보시길래 감자, 고구마, 고추, 토마토, , 옥수수, , 열무를 심는다고 했더니 즉석에서 각 농작물을 심고 거두는 시기, 모종 심는 간격과 배열, 지줏대의 높이와 지줏대 묶고 세우는 시기 등을 바로 알려주신다. 부지런히 메모하느라 글씨가 날아가고 한 마디로 놓칠 세라 마음이 분주했다.

다음 날 교장선생님과 함께 텃밭에 거름을 뿌렸다.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오늘 할 일의 순서를 설명하고 창고 앞에서 농기구를 나눠주었다. 텃밭으로 나가서 우리가 거름을 뿌릴 밭의 너비를 헤아리고 모둠별로 이랑을 나눠 맡았다. 교장선생님은 닭장에서 닭똥과 쌀겨가 섞인 거름을 삽으로 퍼서 수레로 퍼서 날랐다. 수연이는 닭장 구석구석에 있는 거름을 비닐에 담아 옮겼다. 아이들과 나는 이랑 위에 어제 산 유기질 비료와 닭장 거름을 뿌리고 레이크로 흙 위에 펼치는 작업을 했다. 밭이 그리 넓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막상 시작해보니 일이 끝이 없었다. 교장 선생님이 텃밭 한쪽에 퍼다 놓은 닭장 거름을 삽으로 퍼서 비닐에 담아서 텃밭에 뿌리는데 거름 무게에 늘어지고 흙에 쓸린 비닐에 금방 구멍이 나는 바람에 부족한 비닐 가지러 교실을 다녀오느라 바빴다. 추가로 가져온 비닐도 동나는 바람에 아이들과 내가 삽으로 거름을 퍼서 고랑 사이를 수도 없이 오가며 거름을 뿌렸다. 밭에 거름을 뿌리고 나서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이 시작된 지 30분이 지난 시각이다. 급식실에 들어가 늦은 급식을 먹는 데 고되게 일한 우리반 아이들 표정이 밝다. 일하는 사진 못 찍었으니 농사꾼처럼 밥먹기 먹방이라도 찍자 했다. 입을 크게 벌려 숟가락 한 가득 밥을 떠서 입 안에 쑤셔 넣고는 콧구멍으로 바람 풍풍 뱉으며 우물우물 밥을 먹는 아이들의 모습이 예쁘다. 나 역시 바쁘게 일하느라 아이들이 어떻게 일을 하고 어떤 감각을 느끼고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차분하게 볼 시간이 없었다. 오늘 학교에 가서 아이들이 어제 했던 그 일들을 글로 쓰고 발표하게 해야겠다.

 

(2018419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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