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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모으기/문장들 : 2019

『여행의 이유 – 김영하 산문』(김영하 / 문학동네 / 2019 )

by 맑은 물 2019. 4. 29.

 

 

 

추방과 멀미

 

우리의 내면에는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강력한 바람이 있다. 여행을 통해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과 세계에 대한 놀라운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 그런 마법적 순간을 경험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런 바람은 그야말로 뜻밖이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 애초에 그걸 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22)

 

인생과 여행은 그래서 신비롭다. 설령 우리가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하고 예상치 못한 실패와 시련, 좌절을 겪는다 해도 우리가 그 안에서 얼마든지 기쁨을 찾아내고 행복을 누리며 깊은 깨달음을 얻기 때문이다. (24)

 

“평범한 회사원? 그런 인물은 없어.”

모든 인간은 다 다르며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딘가 조금씩은 다 이상하다. 작가로 산다는 것은 바로 그 다름과 이상함을 끝까지 추적해 생생한 캐릭터로 만드는 것이다.

 

오래 살아온 집에는 상처가 있다. 지워지지 않는 벽지의 얼룩처럼 온갖 기억들이 집 여기저기에 들러붙어 있다. 가족에게 받은 고통, 내가 그들에게 주었거나 그들로부터 들은 아픈 말들은 사라지지 않고 집구석구석에 묻어 있다. 집은 안식의 공간이어야 하지만 상처의 쇼윈도이기도 하다. 그래서 가족 간의 뿌리 깊은 갈등을 다룬 소설들은 어김없이 그들이 오래 살아온 집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작가는 우렁찬 목소리보다는 작은 속삭임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자신 없는 음성으로 낮게 읊조리는 소심한 목소리에 삶의 깊은 진실이 숨어 있을 때가 많다. 그런 웅얼거림을 잘 들으려면 발화자 가까이에서 귀를 기울여야 한다. (79)

 

모국어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지만 이제 그 언어의 사소한 뉘앙스와 기색, 기미와 정취, 발화자의 숨은 의도를 너무 잘 감지하게 되었고, 그 안에서 진정한 고요와 안식을 누리기 어려워졌다. 모국어가 때로 나를 할퀴고, 상처 내고, 고문하기도 한다. 모국어를 다루는 것이 나의 일이지만, 그렇다고 늘 편안하다는 뜻은 아니다. (80)

 

여행은 그런 우리를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부터 끌어내 현재로 데려다 놓는다. (82)

 

일상에서 우리가 느끼는 모호한 감정이 소설 속 심리 묘사를 통해 명확해지듯, 우리의 여행 경험도 타자의 시각과 언어를 통해 좀더 명료해진다. 세계는 엄연히 저기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세계와 우리 사이에는 그것을 매개할 언어가 필요하다. 내가 내 발로 한 여행만이 진짜 여행이 아닌 이유다. (117)

 

환대는 이렇게 순환하면서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그럴 때 진정한 가치가 있다. 준만큼 받는 관계보다 누군가에게 준 것이 돌고 돌아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는 세상이 더 살 만한 세상이 아닐까. 이런 환대의 순간을 가장 잘 경험할 수 있는 게 여행이다. (147)

 

(2019년 4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