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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풀어놓기/독서일기

체벌의 추억

by 맑은 물 2019. 2. 1.

사랑해서 때린다는 말

세이브더 칠드런 기획 / 오월의봄 / 2018

 

『사랑해서 때린다는 말』 (세이브더 칠드런 기획 / 오월의봄 / 2018)을 읽었다.

부제는 '인문학으로 바라본 체벌 이야기'

유독 기억에 남는 건 '휘핑 보이' 이야기다. 체벌의 역사는 유구해서 중세 유럽 귀족 가문의 아이도 예외는 아니었단다. 당시에는 어린이를 교육한다는 건 아이 마음에 깃든 '악마'를 내쫓는 일이었고, 그 악마를 쫓아내기 위해서는 아이를 때려야 했다. 문제는 귀한 자기 자식이 고통받는 건 보기 싫다는 것. 그래서 가난한 가정의 아이를 고용해서 자기 아이 옆에 세워놓고 아이가 잘못할 때마다 그 아이를 때렸단다. 대신 매 맞는 아이가 바로 휘핑 보이였다. 휘핑 보이가 매맞는 모습을 보며, 귀족 아이가 죄책감을 느꼈을지? 휘핑 보이는 매를 맞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지? 악마를 내쫓기 위한, 창의적으로 악마적인 발상이다.

내게도 대신 매를 맞았던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허리까지 늘어진 퍼머 머리를 흩날리며, 분홍 꽃무늬 원피스를 즐겨 입었던 처녀 선생님은 5학년 사내 아이들의 무법정신을 다스리고자 전전긍긍하던 끝에 창의적인 발상을 내 놓으셨다. 지휘봉, 빗자루, 마대자루 가리지 않고 교육적인 열정을 불태우며 매를 휘둘러도 멧집 좋은 사내 녀석들은 연일 태업 중이었니 특단의 조처가 필요했을 것이다.
어느날 여자 분단의 분단장은 남자에게, 남자 분단의 분단장은 여자에게 맡기더니 그 분단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분단장이 책임져야 한다고 선언하셨고, 나는 남자 분단의 분단장이 되었다.
다음 날 아침. 분단장이 일기를 걷어 내라고 하셨다. 우리 분단의 남자 아이들이 12명이었던가? 남자 아이들은 '일기 그게 뭔가요?'하는 표정으로 멀뚱히 나만 바라봤고, 일기장 한 권 없이 빈 손으로 선생님께 가서 하루살이 날갯짓보다 작은 소리로 "애들이 일기 다 안썼대요." 하자마자 선생님의 눈이 번쩍였다.
선생님은 아침부터 날뛰는 아이들을 모두 자리에 앉히더니, 나를 앞으로 불러세웠다.
"너는 분단장으로서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았으니 일기장 안낸 명수대로 맞는 거야."
손바닥을 가슴 앞으로 들어올렸다. 설마했는데 진짜 세게 때렸다. 한 대를 맞을 때마다 밑으로 쳐지는 손등을 막대기로 추어 올리며, 매가 반복될수록 더 강하게, 그렇게 12대를 맞았다. 시뻘겋게 부풀어 오른 두 손은 내 의지와 무관하게 부들부들 떨렸고 내 자리에 돌아와 앉았을 때는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 단체로 정지장면을 연기하는 배우들처럼 교실의 아이들은 미동도 않는데, 선생님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자신감 넘치고 청아하게 교실에 전체에 울려퍼졌다.
쉬는 시간에 담임이 교실 밖으로 나가자마자 나는 책상에 엎드려서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남자 아이들이 내 주변에서 엉거주춤하니 서서 말 한 마디 못하고 서성이길래 더 크게 울었다.
다음 날 내가 맡은 분단의 남자 아이 12명이 전원 일기를 써왔다. 그것도 아주 정성스럽게. 담임 선생님은 만족하게 미소지었고, 나도 얼어붙은 미소로 화답해주었다.

남자 아이들을 대신해서 맞은 나는 휘핑 보이처럼 수당을 받지도 칭찬을 받지도 않았다. 나는 추후라도 담임이 내게 미안하다고 말해주지 않을까 기대를 가졌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자기 대신 맞는 꼬맹이 여자 아이를 보며 죄책감과 연민을 느낀 남자 아이들에게 눈꼽만큼의 원망도 없다. 오히려 그 사내 아이들도 그 때 나만큼 아프지 않았을까 안스럽기까지 하다. 다만 자신이 가진 권력을 그런 방식으로 행사한 그녀에 대해서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용서가 안된다. 아마도 이제는 정년 퇴임을 했을 나이. 세월이 흐르며 그녀는 자신이 한 때 행했던 창의적인 악행을 기억하고 후회했을까?

(2월 1일)